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7층에 있는 개성공단기업협회(이하 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많이 고단해 보였지만 눈빛과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를 마치자 말자 달려온 것이라고 했다. 10일로 꼭 1년이 되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 사태. 개성공단 중단으로 다시 ‘날벼락’을 맞은 123곳 입주 기업의 대변자로서 국회와 현장을 바쁘게 뛰어다니는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을 만났다.
“입주 기업 10곳 중 7곳은 개성공단에 생산의 70% 이상을 의존했다.” 정 회장의 설명이다. 9일 협회가 발표한 ‘개성공단 중단 1년 입주 기업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성공단이 멈춘 지난 1년 동안 입주 기업 1곳의 평균 영업 손실은 약 20억 원 내외, 123곳 전체 손실은 2500억 원 규모로 추정됐다. 응답한 84개사 기업들은 연매출이 평균 31.4% 급감했다고 답했고, 연매출이 80% 이상 폭락해 사실상 휴업 상태라고 밝힌 기업들은 11개사였다. 통일부가 이틀 전 발표한 자료에서도 개성공단에 생산을 전적으로 의존한 45개사는 기업 경영 정상화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45곳 중 36곳은 재하도급 방식에 의존해 겨우 지속하고 있다.
현재 국내외 지역의 다른 공장에서 생산을 이어가는 입주 기업은 75곳. 조업에 나섰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 회장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뭔가 해보겠다고 신규로 공장을 차린 곳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해외에 신규 설비투자를 진행했을 경우, 초기 3년여 간은 적자를 보면서도 자본을 계속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그는 이어 “저 같은 경우는 2 ~ 3년 내에 개성공단이 열릴 확률이 높다고 보기 때문에 해외 투자를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신규 설비 투자를 진행한 디엠에프의 최동남 대표는 “개성공단 생산 규모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돈 들어갈 데는 많은데 나올 데는 없다”며 자금난을 호소한 바 있다.
정부 지원금이 실제 피해 규모에 못 미치다 보니 지원금의 배분을 놓고 입주 기업과 이들의 협력사 간 갈등도 조금씩 불거졌다. 123곳 입주 기업의 생산에 협력해왔던 중소·영세 기업들은 약 5000여 곳이고 이들 대부분이 국내에 있다. 정 회장은 “유동자산 손실이 가장 큰 입주 기업이 89억 원 규모인데, 정부 기준에 따라 피해의 25% 정도인 22억 원밖에 못 받았다. 받은 범위 내에서 밀린 대금을 협력사에 배분해야 하는데 업체 수가 또 워낙 많다. 이해해 주는 데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협력사들은 애초에 정부 피해 지원에서 제외됐다. 이에 일부는 입주 기업에 대해 밀린 대금을 납부하라며 소송을 제기하고, 일부는 거리로 나서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헌법소송도 탄핵심판으로 지연상태= “처음서부터 5000억 원이란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해 3월경 정부가 지원 기준을 처음 언급할 시점에 이미 지원 규모가 5000억 원 정도가 될 것이란 당국자의 예측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 지원금이 남북경협기금에서 조달되고 있어 쓸 수 있는 최대치가 그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정부는 4월 10일까지 실태조사 신고서를 접수했다. 사실이라면 정확한 피해 실태 조사보다 곳간에서 얼마나 나갈지 계산기를 두드려 지원 규모를 결정한 시점이 더 빨랐던 셈이다. 해당 당국은 이에 대해 “공식적인 발표 시점 외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실제로 지난해 말까지 정부가 기업 측에 지원을 완료한 금액은 4838억 원이다. 근로자 지원과 공공기관 경협보험금 지급까지 합하면 5200억 원이다. 이는 7월 협회가 산정한 피해액 1조5000억 원의 3분의 1 수준이며, 정부가 실제 피해를 인정한 7860억 원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그 결과 1조 원의 피해를 123곳의 기업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협회는 정부 집계 방식이 공정하지 않다며 보상을 위한 법적 기준을 만들어서 피해 규모를 재산정해야 한다고 호소해왔다.
이를 위해 작년 여름 발의된 개성공단 관련 법안은 이른바 ‘개성공단특별법’을 비롯해 4건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 측의 부정적 태도 탓에 반년째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소위에 계류 중이다. 정 회장은 “지난해 정부는 ‘개성 공업지구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실태 조사와 지원을 진행해왔다”면서 “그러나 여기엔 명백한 피해 집계·보상 기준이 명시돼 있지 않아 정부의 배상 책임이 없다. 정부는 입주 기업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피해 규모를 집계하고 지원금을 나눠줬다”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우리도 현 박근혜 정부하에서는 공단 재개나 정부 스스로 기업들에 정당한 보상을 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고 체념한 듯 말했다. “설사 이달 열리는 소위에서 바른정당까지 합류해서 정족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재원 문제 때문에 기획재정부의 의견을 듣게 돼 있는데 기재부는 당연히 반대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그렇게 되면 오직 헌법소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보상법을 국회에서 못 만들어 주니 위헌적인 행정 행위에 따른 피해임을 강조하고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손배 소송을 위해선 위법 행위라는 헌재의 판단이 선결 조건이 된다. 협회는 이미 지난해 5월 90% 이상의 입주 기업의 서명을 받고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해 현재 심의 상태에 있다. “탄핵 국면 전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로펌에 질문도 많이 하고 자료 요청도 하고 했는데 요즘은 통 잠잠하다”며 “지난해 12월 시작된 대통령 탄핵 심판 때문에 우리 건은 사실상 진전이 없는 상태”라고 정 회장이 말했다.
◇우리 정부 합의 불이행 더 많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 북한 정부의 불안정성이 더 커진 것은 맞지 않냐”고 묻자 정 회장은 “적어도 개성공단에 관해서는 우리 정부가 합의를 지키지 않은 게 더 많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 국가의 정책이 연속성을 가지려면 대통령이 바뀌더라도 지난 정부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이해 당사자가 있는 정책인 경우는 더 그렇다”면서 “우리는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을 아예 뒤집어 버린다”고 말했다. 북한의 불안정성을 논하기 전에 남한의 불안정성을 돌이켜봐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정부가 북측과의 어떤 합의들을 지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 회장은 먼저 ‘남북 합의의 위반’을 들었다.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 교류를 전면 차단한 5·24 조치가 있었던 때에도 당시 정책 결정자들이 남북 관계의 마지막 끈을 남겨야 한다는 판단하에 개성공단의 신규 투자를 불허하는 수준에서 현상 유지를 해 왔다”며 “2013년 2월에도 핵실험이 있었지만, 정부는 8·14 합의를 통해 남북 간의 정세와 상관없이 개성공단은 정상적으로 가동한다는 정경분리 조항에 합의했다. 그런데 지난해에 다시 뒤집혔다”고 지적했다.
“또 개성공단에 3단계에 거쳐서 2012년도까지 공업 부지를 800만 평 만든다고 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핵과 연계시켜 이를 안 했다. 그때부터 북한이 ‘왜 약속 안 지키냐’며 반발하기 시작했다”고 그가 설명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나오게 된 것도 이 시기 이후라고 했다. 그는 “북한 입장에선 빵떡이 20개 생긴다고 했는데, 1개도 안 생긴 거다. 공단 부지에 주둔하던 군대는 군부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물려 버렸다”며 “그 외 정부가 약속했던 노동자 공급을 위한 숙소, 도로 개보수 등 인프라 건설 약속도 서면 합의까지 갔다가 이명박 정부 이후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국민이 많이 모르셔서 그렇지 개성공단은 국익 차원에서 득이 실보다는 큰 곳이었다”며 2013년 재가동 후에 일어난 일화를 들려줬다. “2013년도에 공단이 중단됐다가 재개된 이후 북측 노동자들도 일터의 소중함을 알았고 우리 쪽을 이해하게 됐다.” ‘기업에 뭘 받아 내려면 윽박지르기보다 기업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면서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 노동자 임금이 월 100달러 수준에서 200달러 수준으로 2 ~ 3년 사이에 급격히 오른 게 이 시기다. “그냥 오른 게 아니라, 북측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서 생산량을 그만큼 올려주고 기업들에 받아낸 것이다”며 “기업 입장에서도 2013년 중단 기간 손실에 대해 반등이 필요하던 2014 ~ 2015년도에 좋은 경영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그들도 자본주의 이치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들이었으니까 갈등이 많았다. 개성공단에서 함께 일하면서 서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라며 덧붙였다.
◇재개 땐 재입주…대선 이후 기대= 통일부는 불과 얼마 전 ‘개성공단 중단 1년’ 제하의 설명자료를 내고 “북한이 비핵화를 통해 ‘진정성 있는 태도 변화’가 있어야 개성공단이 재개될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정경분리 기조를 뒤집어 개성공단과 북핵을 연계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정 회장은 “지금 정부는 정말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열려고 핵도 동결하고, 미사일 개발도 동결하고 할 것 같지는 않다. 핵과 미사일은 그들의 생존 문제이지만, 개성공단은 작은 경제적 문제이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탄핵 심판 이후의 정국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탄핵 후 조기 대선에서 남북 관계라든지 개성공단에 대한 인식과 의지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개성공단의 미래가 크게 좌우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9일 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개성공단 입주 기업 중 93%가 공단의 재개와 재입주 의향을 밝혔다.
[정기섭 회장은…]
2013년도 개성공단기업협회 수석부회장직을 거쳐 이듬해 4월부터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직을 맡아온 정기섭 회장은 지난해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 후 협회 조직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바뀌면서 비대위원장으로 현장을 뛰고 있다. 당시 ‘공단이 재개할 때까지’ 비대위 체제로 전환한 터라 위원장으로서 정해진 임기는 없다.
그 자신이 개성공단에서 임가공을 통해 연간 150억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던 의류제조업체인 에스엔지 대표이사이기도 하다. 현재 에스엔지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해 중단이 있은 후 개성공단이 재개될 확률이 높다고 본 그는 신규 투자에 나서는 대신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활동에 전념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