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4일(현지시간) 치러진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부결되면서 유로존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정정불안이 시중은행의 줄도산으로 이어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후폭풍이 몰아닥칠 것이란 관측이 힘을 받고 있다.
◇ 렌치 총리 결국 사의 표명=이날 이탈리아 전역에서 치러진 개헌 국민투표 이후 현지 공영방송 RAI와 LA7 등 이탈리아 방송사가 발표한 출구조사 결과 반대가 54∼59%로 찬성 41∼46%에 월등히 앞선 것으로 집계됐다. 렌치 총리는 자정을 넘긴 시간 총리 궁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패배를 인정, “전면적 책임을 지겠다. 정부에서의 내 경력은 여기서 끝난다”며 사퇴를 선언했다. 렌치 총리는 그간 국민투표 부결시 총리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언해왔다. 이로써 렌치 총리는 2년 9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됐다. 이번 국민투표는 현재 315명인 상원의원을 100명 줄이고, 상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것에 대해 찬반을 묻는 투표였다. 상원을 대폭 축소하는 동시에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개정안의 핵심이었다. 상원과 하원이 입법 거부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동등한 권한을 가져 입법이 지연되거나 차단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렌치 총리는 개정안을 통해 정치 안정을 유도, 이탈리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4년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하더라도 70%를 넘나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개헌안이 좌절된 것은 젊은 층의 반대가 특히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탈리아 실업률은 11%대 중반을 넘나들고, 청년실업률은 40%에 육박한 상황이다. 이탈리아 젊은 세대는 렌치 총리의 개혁 정책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재임 기간 청년실업률이나 지지부진했던 경제성장세가 체감할 만큼 개선되지 않자 렌치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으로 분석된다. 장년층과 노년층의 경우 난민 유입 급증에 대한 반감이 헌법 개정안 반대표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올해 현재까지 유입된 난민 수는 17만1000명으로 종전 최고 기록인 2014년 17만명이 넘었다.
◇ 8개 시중은행 줄도산 우려=렌치 총리의 사퇴로 당분간 이탈리아는 정치적 혼돈과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렌치 총리가 주도했던 금융 안정화 정책이 그의 사임으로 방향성을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당장 가장 취약한 고리로 지목되는 이탈리아 3위 은행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인 몬테 데이 파스키 데 시에나(BMPS)는 연말까지 도산을 피하기 위해서는 50억 유로의 유상증자를 해야 하는데, 이를 완료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BMPS는 유상증자의 전제조건으로 꼽히는 출자전환을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은행은 2일 10억 유로의 부실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는 데 가까스로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는 전체 출자전환 대상 부실채권 43억 유로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유상증자를 위해서는 이 밖에 주요 투자자로부터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개헌 국민투표가 부결될 경우 한때 부도 위기에 몰렸던 이탈리아 3대 은행 몬테 데이 파스키 데 시에나(BMPS)를 포함해 8곳의 은행들이 줄도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 유로화 20개월래 최저…유로존 긴장= 이날 유로화는 20개월래 최저치로 추락했다. 도쿄외환시장에서 유로·달러 환율은 1.06달러 대 후반을 나타내고 있다. 한때는 1.0506달러로 지난해 3월 이후 최저치까지 하락했다. 유로존에서 세 번째로 큰 이탈리아의 정정불안으로 시중 은행이 줄도산 하면 유로존 금융시스템 전반에 패닉이 초래 것이란 우려가 엔화 가치를 끌어내린 것이다. 이탈리아 은행의 부실대출 액수는 모두 3600억 유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보다 4배 급증해 국내총생산(GDP)의 17%에 이른다. 이탈리아 은행권의 또 다른 치명적인 특성은 은행채권 투자자 중 개인투자자 비중이 45%에 이른다는 것이다. 은행 채권 상당 부분을 국민들이 들고 있는 탓에 은행이 파산하면 EU가 새로 마련한 채권자 손실부담(Bail-in) 규정에 따라 국민들의 부담이 더 커지게 되고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일어날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