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뇌 굴리지 말고 각자 내요

입력 2016-11-02 13:39 수정 2016-11-03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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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삶은 감자, 은경이는 찐 옥수수, 현종이네는 양계장을 하니까 삶은 계란, 쌀집 아들 승희는 떡 좀 해오면 되겠다. 나는 몇 달 전에 엄마가 빚은 막걸리를 가져올게.”

1981년 초겨울 강원도 광산촌의 한 초등학교 교실. 아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책거리 계획을 짜고 있다.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은 크지만 대접할 것이라곤 집에서 만든 간식거리와 막걸리가 고작이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제자들이 마련한 조촐한 행사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한다. 나이가 들수록 새록새록 떠오르는 참 좋은 추억 속 한 장면이다.

책거리는 옛날 서당에서 학동들이 ‘천자문’ ‘명심보감’ 등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학부모들이 훈장에게 음식과 술을 대접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던 행사다. 책씻기, 책례(冊禮), 세책례(洗冊禮)라고도 한다. 지금으로 치면 촌지(寸志)인 셈이다. 촌지란 한자 그대로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소박한 정성과 마음이 담긴 선물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주로 선생이나 기자에게 주는 것을 이를 때 쓰는 말로 올라 있다.

그런데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기자, 교사들 때문에 ‘촌지’가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이들이 부패한 관료, 정치인, 기업인들과 결탁하면서 촌지는 ‘검은돈’, ‘뇌물’ 등 부정적인 의미로만 통용되고 있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시행한 지 한 달여 지났다. 직장인 사이에 ‘더치페이 앱’이 떠오르는 등 사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교문 경비실 앞에 선물 반송함이 비치되는 등 학교 풍경도 달라졌다. 고교생인 작은아이는 체육대회와 소풍날에 선생님 도시락도 준비하면 안 된단다. 민감한 시기라 다들 조심하는 눈치다.

국적불명의 외래어 ‘더치페이(Dutch pay)’가 신문, 방송에 자주 오르내려 안타깝다.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의미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접대’ 문화인 ‘더치 트리트(Dutch treat)’에서 생겨난 말인데, 네덜란드인들에게도 썩 듣기 좋은 용어는 아니다. 영국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트리트(treat·대접하다)’를 ‘페이(pay·지불하다)’로 바꿔 부르며 네덜란드의 접대 문화를 비하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더치페이 대신 ‘각자 내기’, ‘나눠 내기’ 등 우리말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말하고 듣기에도 편안하다. 각자 내기는 한자어로 각출(各出)이다.

각자 내기와 비슷한 말로 추렴, 갹출, 거출 등이 있다. 모임이나 놀이, 잔치 등 같은 목적을 위하여 여럿이 각각 얼마씩의 돈을 내어 거둔다는 의미다. 이 중 추렴은 한자어 출렴(出斂)에서 온 말로, 중장년층이라면 통술집이나 대폿집에서 막걸리 추렴을 했던 즐거운 추억이 있으리라. 한자 ‘醵出’의 ‘醵’은(는) 음이 ‘갹’과 ‘거’ 두 가지인 까닭에 갹출, 거출로 읽을 수 있다.

선물은 ‘선뜻 주는 것’, 뇌물은 ‘뇌를 굴리면서 주는 것’이란 우스개가 있다. 경찰관에게 감사의 인사로 떡을 건넨 시민이 김영란법 위반 1호, 경찰관에게 1만 원을 건넨 70대 노인이 법 위반 2호다. 이들이 과연 뇌를 굴리면서 건넸을까? 떡도 함부로 못 돌리는 세상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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