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입력 2016-09-1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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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T(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우리 생활에 다양한 유용한 가치를 창출했다. 이 중 정보를 취득하고 전달하는 수단의 진화는 일상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3차 산업 혁명의 기폭제가 된 인터넷의 등장이 그렇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근무 환경까지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또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에는 인터넷 범용성이 모바일로 확대됐다.

하지만 그 유용함에는 반대급부가 수반됐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붉은 낙인이다. 소설 ‘주홍글씨’ 속 주인공 가슴에 ‘A(Adultery·간음)’라는 낙인이 영원히 남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개인의 기록이 담긴 일기와 사진, 영상이 온라인이나 모바일에서 완전히 지워지기를 바라는 ‘잊혀질 권리’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아무리 성인(聖人)이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고, 죄인에게도 미래가 있다.”

아일랜드 소설가 겸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다. 최근 지검장 출신인 김수창 변호사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언급하며 법정에서 인용해 세간의 이목을 받은 문구다. 하지만 인터넷과 모바일의 등장으로 현실은 ‘숨고 싶어도 숨을 수 없고,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구조로 바뀐 지 오래다. 한순간의 실수는 인터넷이나 모바일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남긴다. 심지어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 유출되거나, 미확인 내용이 사실로 둔갑해 유포되는 사례도 급증하면서 2차, 3차 피해로 이어지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 때문에 국내외에서도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잊혀질 권리가 처음 언급된 시점은 20여 년 전인 1995년이다. 당시 유럽연합(EU)은 ‘유럽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을 통해 잊혀질 권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7년 뒤인 2012년에는 EU가 제정한 ‘일반정보 보호규정’을 통해 법적인 보장을 받게 됐다.

그러나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ECJ)의 한 판결을 계기로 본격 촉발됐다.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곤살레스는 자신의 집을 경매 처분한 것과 관련된 1998년의 기사 내용이 더 이상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며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ECJ는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두 달 만에 10만 건 넘는 삭제 요청이 구글에 쇄도했다. 구글이 같은 해 7월 중순 EU 데이터보호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잊혀질 권리에 근거해 삭제를 요청한 링크 수는 32만8000건이나 됐다. 이를 계기로 다른 나라들도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국내에서도 올 들어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올 7월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성인남녀 78%가 자신이 SNS 등에 올린 글이나 사진 등을 지우고 싶어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에는 정부가 직접 나서는 분위기다. 올 6월 방송통신위원회는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회원 탈퇴나 게시판 사업자의 폐업, 타인의 댓글 등으로 삭제하기 어려웠던 본인의 게시물에 대해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가이드라인 제정 당시 알권리 침해와 국내외 사업자 간 역차별 논란 등으로 큰 진통을 겪기도 한 만큼,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는 넘어야 할 걸림돌이 산재한 것도 사실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악용의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인권의 사각지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잊혀질 권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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