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증권업계 고위 임원이 난데없이 김영란법 푸념을 늘어놓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애초 사립학교 교직원과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28일 시행하는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후폭풍이 여의도 증권업계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아보인다는 우려에서다.
우선 국내 자본시장의 큰손이자 갑(甲)인 국민연금의 자금을 위탁받는 금융사들도 김영란법 적용 범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법조계의 해석으로 대다수 증권사와 운용사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현행 김영란법 11조 1항 2호는 법령에 따라 공공기관의 권한을 위임·위탁받은 법인·단체 또는 그 기관이나 개인을 법 적용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공적기관인 국민연금의 자금을 위탁받는 운용사나 증권사들은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 중 하나인 ‘공무수행 사인(私人)’에 해당될 수 있다는 해석이 일부 로펌에서 나오는 실정이다.
한 증권사 법인영업 담당자는 “국민연금이 전주로 이전하면 KTX 교통비만 해도 타격이 큰데, 김영란법 적용 대상에 위탁 증권사들도 해당된다면 교통비도 범위에 해당하는지 확인 좀 해봐야겠다”며 “사실상 큰손인 국민연금 자금을 위탁받는 입장에선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사보나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정기 간행물을 발간하던 금융사들도 전통 있게 발행해오던 간행물을 중단하기로 했다. 금융업의 특성상 상품이나 제도 등 이슈를 안팎으로 알려야 하는 금융기관들의 협회 역시 외부 발간자료를 잇달아 중지하고 있다.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는 원래 방송, 신문, 뉴스통신, 인터넷 신문 사업자, 잡지 등 정기간행물 사업자를 말하는데, 잡지 등 정기간행물 사업자 가운데 잡지나 기타 간행물을 발간하는 곳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기관들의 발행물을 위탁 받아 외부에서 발행하던 중소 인쇄, 출판업체들은 난데없는 금융기관 고객들의 선택에 자칫 밥그릇을 뺏길 위기에 놓였다.
여의도에 있는 일식집, 한우집 등 식당들의 표정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당장 접대비의 상한선이 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국내산을 고집해 단가가 비싼 이들 식당에 고객들의 발걸음이 뜸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련, 식당들은 점원들을 줄이거나 아예 업종을 변경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최근 만난 증권사 사장은 “중장기적으로 주식시장 전반에도 김영란법이 영향을 미칠 것을 대비해 브로커리지 대신 부동산, AI(대안투자) 등 다른 특화된 비즈니스를 발굴하고 있다”며 “실상 주식 고객 기반이 자영업자들이고 여유자금으로 재테크나 주식투자에 나서는 것인데, 생계가 막히면 증시 거래대금 자체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영란법이 추구하는 본질은 박수칠 만하다. 하지만, 당초 공공부문의 부패를 해소하기 위한 법 취지와 달리 국내 경제중심지 여의도는 물론 다른 민간영역의 밥줄까지 위축시키고 있다는 씁쓸한 진실엔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법 테두리가 아직은 모호하다 보니 자칫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하지 않을지 우려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