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음수야(Joyce Msuya) 세계은행그룹(WBG) 한국사무소 소장(Special Representative, Korea)에 대한 선입견은 이런 것이었다. 영국과 캐나다에서 유학을 했고 WBG에서 20여년간 경력을 다져온 탄자니아 출신의 여성. 적어도 ‘잘 사는 집 딸’쯤은 되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 아직까지 서방으로부터 받는 원조가 나라 살림의 40%나 되는 나라, 1인당 소득은 694.77달러(2013년 기준) 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이 정도 수준의 교육을 받고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되겠냐는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럽지 않을까.
“오, 아니에요. 부모님은 보통의 공무원이었어요. 어머니는 17세에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른 후에 대학에 갔어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전격적으로 지지해줘서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죠. 아버지가 공무원으로서 작은 마을(village) 단위에서부터 커뮤니티, 도시 등으로 승격돼 이동하면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도 비슷한 일을 하시고자 했어요. 그리고 지역 개발학을 공부하셨어요. (놀라는 기자를 보며) 네, 이례적인 경우 맞습니다. 탄자니아 여성들이 일을 하긴 해도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거든요. 어머니는 런던 유학을 마치고 온 뒤에 바로 또 케냐로 떠나 공부를 계속했어요. 거기서 5년간 공부를 하고 탄자니아로 돌아와 셋째 아들을 낳고 또 케냐로 떠났죠. 경영학과 금융 공부를 하신 뒤 중앙은행인 뱅크 오브 탄자니아(Bank Of Tanzania)에서도 고위직으로 일하셨지요. 저는 어머니가 탄자니아로 돌아와서 낳은 딸입니다. 저, 특별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닙니다. 공립학교에 다녔어요”
편견이 깨졌다. 음수야 대표는 소위 ‘금수저’로 자란 공주님은 아니었다. 어머니에 이어 도전의 아이콘으로 살고 있는 이였던 것. 다만 그의 아버지는 이후 장관 및 총리를 역임했다.
1880년대부터 1919년까지 독일의 식민지였다가 그후 1961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는 1961년 독립한 탕가니카와 1963년 독립한 잔지바르가 1964년 통합해 생긴 국가다. 탄자니아는 ‘우자마’로 불리는 아프리카식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현재는 시장경제 중심의 경제 체제를 택하고 있다.
음수야 대표는 사회주의 시도는 실패했고 중산층도 몰락했지만 그 때문에 ‘모두가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 자체는 확실히 심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탄자니아 역시 다민족 국가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저희 할머니의 경우만 봐도 집에서는 전혀 남녀 차별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를테면 밥은 여성들이 해도 남성들이 치우는 분업화가 잘 이뤄졌죠. 저도 학교에 다니면서 마오쩌둥(毛澤東) 등 사회주의를 배웠습니다. 중국도 남녀가 모두 같이 일하는 평등한 사회잖아요. 이런 사회주의 영향으로 아마 남녀가 평등한, 여성도 반드시 일을 하는 분위기가 탄자니아에선 당연했던 것 같습니다”
음수야 대표는 어머니가 일하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런 기억과 함께 1년 간의 의무 군복무 시절이 자신이 지금껏 일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군대에서는 먹는 음식도 형편없었고 고생했지만 종교와 인종, 사회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더할 나위없는 다양성 학습의 시간이었죠. 또한 부모님은 도시에 살고 있더라도 한국에서 추석이면 고향이 들르는 것처럼 시골에 꼭 방문했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된 곳들을 직접 보면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야겠다’‘환경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습니다. 그것이 결국 저를 WBG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합니다”
유학도 부모님 지원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4년 장학금을 받게 된 음수야 대표는 영국 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에 진학해 3년만에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년 남은 장학금으로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이었다. 생화학으로 석사 학위도 받고 연구실(Lab)에 들어갔지만 갇혀있는 생활은 음수야 대표에게 맞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학교 국제학센터의 한 연구에 참여하게 됐다. 연구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적 캐나다로 떠난 사람들이 전염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고국에서 일하기 위해서도 보건, 건강 분야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연구에 매진하던 음수야 대표는 우연히 WBG에서 온 사람과 만나게 됐다. 그 사람은 음수야 대표에게 “WBG에서도 이 일을 해 볼 기회가 있다. 지원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고 지원해 합격하게 된다.
“아마도 당시 총재였던 제임스 울펀슨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며 아프리카 여성에게 더 기회를 주고자 했던 행운을 잡은 건지도 모릅니다. WBG는 상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입니다. 심지어 지금 WBG의 ‘넘버2’는 인도네시아 출신인 무슬림 여성이죠. 유리천장은 적어도 세계은행 내에서는 없어요. 올해 3월 기준으로 전체 매니저급 인원의 44%가 여성이죠. 처음에는 세계은행에도 남성들만 득시글했죠. 그러나 어느 순간 매니저급 이상의 포지션 절반은 여성으로 하자는 합의가 이뤄졌고 강제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여성을 많이 기용하는 것이 좋다’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 보고 배울 만한, 롤모델을 삼을 만한 여성 멘토들도 많고 이것이 선순환을 이루고 있습니다”
WBG 산하에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국제개발협회(IDA), 국제금융공사(IFC), 국제투자보증기구(MIGA) 국제투자분쟁해결본부(ICSID)가 있고 이 가운데 IFC와 MIGA 부총재는 여성이 맡고 있다. 한국사무소에서는 이 가운데 IBRD와 IFC, MIGA 조직 인원이 우선적으로 배치돼 있다.
“WBG 그룹에서 그럼 여성 총재가 나올 수도 있을까요?”라 묻자 음수야 대표는 “매우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김용 총재도 최초의 비(非) 백인 총재였듯 여성 총재도 분명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국에서 본 여성들의 지위는 어떠한 것 같냐고 물었다. 음수야 대표는 의외의 답변을 들려줬다.
“저는 세계은행에서 이 만큼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혜택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라면서 “아이가 외국인학교에 다니는데 한국인 학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기가 남다르더군요. 특히 전업주부들의 경우엔 놀라울 정도인데 나의 부모님도‘내 딸에게는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키우셨고 저도 딸에게 ‘너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며 한국 엄마들처럼 욕심내 키우고 있어요”라며 웃었다.
그는 올해 만 16세 된 딸과 12세 아들을 두고 있다. 가끔 아이들을 탄자니아로도 데려간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엄마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느냐”며 놀라며 존경심도 갖는 것 같다고.
아직 이른 얘기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 지도 궁금했다. 음수야 대표는 “은퇴 전까지는 지금까지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관련된 일을 더 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WBG와의 관계를 돈독히 만드는게 1차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보람있는 일이죠”라면서 “은퇴 후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방면적인 멘토링을 하고 싶습니다”고 밝혔다. 그가 갖고 있는 ‘부드러운 열정’은 좋은 기운을 발산한다. ‘유사 남성’‘명예 남성’이 될 것이 아니라 진짜배기 여성 리더는 이래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