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확충펀드. 정부가 마련한 기업 구조조정 ‘실탄’ 지원 통로입니다. 뜬구름 잡던 ‘한국판 양적완화’의 구체적 방법이죠. 한국은행도 1년 만에 기준금리를 전격 인하(1.5→1.25%)하며 정책 보조를 맞췄네요.
무슨 얘기냐고요? 조선ㆍ해운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건 익히 아실 겁니다. 양대 원양선사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용선료 협상에 ‘파란불’이 켜지면서 간신히 한숨 돌리긴 했지만, 여전히 자금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대규모 혈세가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은 5조원대 손실을 감추려다 적발돼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4조5000억원을 지원받고도 회생에 실패한 STX조선해양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요.
“좀비기업은 도려내면 되는 거 아니야?”
그동안 조선ㆍ해운업 관련 기사를 보며 이런 생각하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 경제에 위협이 되는 기업이라면 퇴출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좀비기업인지, 아닌지 걸러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금융ㆍ고용시장에 충격이 가지 않게 ‘뿌리’를 정리하는 과정도 필요하고요. 모두 ‘돈’이 필요한 일들이죠. 그 돈을 마련하는 방법이 바로 자본확충펀드입니다.
‘What(무엇)’에 대한 궁금증은 풀어졌나요? 이제 자본확충펀드 질의ㆍ응답 형식을 통해 나머지 ‘How(어떻게)’, ‘why(왜)’ 등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자본확충펀드 재원은 어떻게 마련되나요?
=이번 자본확충펀드에 들어가는 돈은 총 11조원입니다. 한은은 발권력을 동원해 대출 형태로 기업은행에 10조원을 지원합니다. 기업은행은 여기에 후순위로 1조원을 보태 자산관리공사(캠코)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에 재대출하죠. 펀드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발행하는 조건부자본증권(코코본드)을 인수하는데요. 이 돈이 바로 구조조정에 필요한 ’실탄’입니다.
도관은행은 기업은행이 맡습니다. 한은이 준 10조원이 펀드로 갈 수 있게 ‘파이프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국민 모두의 은행’ 기업은행에 부실이 생기면 어쩌느냐고요? 신용보증기금이 지급보증을 서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은 주머니서 나가는 ‘돈’은 똑같은데, 왜 복잡하게 SPC를 만드는 거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자본확충펀드의 핵심이죠. 법적 근거와 손실 가능성 때문인데요. 우선 한은은 산업은행 채권을 직접 살 수 없습니다. 법으로 금지돼 있거든요. 직접출자를 위해선 한은법을 개정해야합니다. 국회 동의를 구하느라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칠 수도 있죠. 하지만 자본확충펀드는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하는 위원 4명만 찬성하면 됩니다. 훨씬 빠르죠.
중앙은행에서 빠져나가는 돈인데, 손실 가능성도 따져봐야죠. 한은의 직접출자는 산은 부실 가능성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대출 형태를 띠면 담보(보증)가 있으므로 손실 위험이 줄어듭니다. 한은 입장에선 중앙은행 체면도 지키면서 원금회수 가능성도 더 높이는 효율적 방법이죠.
◇11조원을 한꺼번에 주나요?
=아닙니다. 구조조정 진행 과정에서 필요할 때마다 돈을 줍니다. 어려운 말로 ‘캐피털 콜’ 방식이라고 하죠. 다음 달 1일을 시작으로 내년 말까지 운영되고요. 첫 번째 지원 규모는 5조~8조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확충펀드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던 2008년에도 자본확충펀드가 조성됐었습니다. 기업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하락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죠. 한은이 10조원을 산은에 대출해주고, 산은은 2조원을 보탰습니다. 기관과 일반투자자들은 8조원을 투자했고요. 이 돈은 시중은행이 발행한 후순위채(BIS비율 계산할 때 자본으로 인정)를 사들이는 데 사용됐습니다. 2016년판 자본확충펀드와 다른 점은 당시 대출자로 동참했던 산은이 수혈 대상이 됐다는 점입니다.
◇오늘(9일) 한은은 왜 기준금리를 내린 건가요?
=오늘 금통위 결정에 놀라신 분들 많을 겁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 질문에 “경기 회복을 지원하려면 통화정책뿐 아니라 재정정책과 구조조정이 같이 가야 한다”고 답했죠. 한은이 지원하는 10조원은 새로 찍어내는 돈(발권력)입니다. 시중엔 ‘매칭되지 않는’ 유동성이 생겨나겠죠. 시중금리가 떨어질 겁니다. 이를 조절하려면 통안채 발행(한국은행이 시중 통화량 조절을 위해 금융기관을 상대로 발행하고 매매하는 채권)을 늘리면서 공개시장을 조작해야 하는데요. 시장에선 이를 ‘긴축 정책’으로 오인할 수 있습니다. ‘경고등’이 켜진 1220조원 가계부채에 부담이죠.
또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자는 밀릴 테고, 지갑을 꽉 닫히겠죠. 경기가 악화될 겁니다. 이번 기준금리 인하는 미국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구조조정의 부정적 영향을 선제적으로 완화하려는 한은의 특별 조치인 셈입니다.
*친절한 용어설명
△SPC(Special Purpose Company)가 뭔가요?
말 그대로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일반 기업이 ‘찻잔’이라면 SPC는 ‘일회용 종이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A회사가 전망 좋은 바닷가에 땅을 갖고 있습니다. 그 곳에 리조트를 지으려고 하는데 노하우도 없고, 가진 돈도 없습니다. B회사로부터 투자를 받으려고 하는데, B사는 A사가 못 미덥습니다. 땅은 참 좋은데 말이죠. 이럴 땐 SPC를 설립하면 간단합니다. A는 땅을 투자하고, B는 투자금을 출자해 지분을 나눠 갖는 거죠.
△BIS(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비율은 뭔가요?
금융 기관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나타내는 지표인데요. 자기 자본(자본금+이익 잉여금+자본 잉여금)을 위험 가중 자산(전체 대출+투자)으로 나눈뒤 100을 곱해 계산합니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이 비율을 10% 이상이 되도록 권고하고 있죠.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면 해외 차입 자체가 어렵거나 높은 조달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