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권에 한때나마 불었던 여풍(女風)이 멈췄다. 올해 말 은행권 정기 인사에서 감축 분위기가 휘몰아치기도 했지만 여성 임원들의 자리가 거의 사라지게 된 것도 유독 눈에 띈다. 여성 대통령 탄생과 함께 국내 은행권 최초 여성 행장이 배출됐고 각 시중은행들에서도 여성 부행장들이 잇따라 등장했지만 임기 만료가 되는 시점에서 더이상 굳이 외부 `눈치보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여성 임원 배출이나 연임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시중 은행들 가운데 이달 초 가장 먼저 인사를 단행한 우리은행에서 임기가 만료된 부행장 5명 가운데 2명만 유임됐고, 유일한 여성이었던 김옥정 부행장도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지난 1981년 입행 당시 95명의 동기 가운데 단 둘만 여성이었을 정도로 남성 위주의 은행 문화 속에서도 꾸준히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을 다지며 부행장에 올랐지만 2년의 임기가 끝이었다.
통합 KEB하나은행에서 김덕자 전무와 최동숙 전무가 퇴임한데 이어 천경미 전무까지 물러나게 됐다. KEB하나은행은 부행장 등 임원 20명 가운데 9명이나 물갈이를 했다. 김덕자, 최동숙 전무는 하나은행 최초의 여성 전무였고, 최동숙 전무 역시 외환은행 최초의 내부 출신 여성 임원으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존재들이었지만 ‘단임’으로 만족해야 했다.
신한은행 신순철 부행장보 역시 탈락했다. 신한은행 내 유일했던 여성 부행장급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KB국민은행에서만 여성 부행장이 홀로 자리를 지켰다. 박정림 리스크관리담당 부행장은 여신그룹담당 부행장으로 전보됐다.
이로써 4대 시중은행(신한·KEB하나·KB국민·우리)의 여성 임원 자리는 전멸(全滅)에 가깝게 됐다.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금융감독원이 제출한 11개 시중은행·특수은행의 ‘남녀 임직원 성비 및 평균연봉’ 자료에 따르면 11개 은행 임원 총 304명 중 여성은 단 20명(6.6%)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줄어들고 만 것이다. NH농협과 한국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에선 한번도 여성 임원이 배출된 적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3년 7월 ‘여성 불모지’에 가까운 은행 등 금융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금융인들이 모인 사단법인 여성금융인네트워크(여금넷) 10주년 기념행사에 축전을 보내 "앞으로 섬세하고 전문성과 열정을 가진 여성들이 금융 발전에 큰 기여와 활약을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4대 시중은행에 한 명도 없었던 여성 임원들이 이후 하나 둘 늘었다. 하지만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국내 최초의 여성 외환 딜러였고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은행, 중국은행(BoC) 등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에서 임원을 맡았으며 외환은행에서 여성 최초로 비상임이사를 맡는 등 여성 금융인들의 대모 역할을 해 온 김상경 여금넷 회장(국제금융연수원 원장)은 “금융권이 발전하려면 여성 임원들이 더 많이 배출되어야 하는데 정부 눈치보기 식으로 여성 부행장들을 몇몇 배출했다가 다시 그 자리를 없애는 것은 근시안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면서 “은행권이 다시 남성 중심의 문화로 후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