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에 갔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이 걸리는 꽤 먼 곳이다. 이곳에는 수제 맥주 공장이 있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그곳.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충청북도 음성에 있다. 음성은 공기 좋고 물 맑기로 유명한 동네다. 맥주의 기본은 물이다. 물 좋은 곳에 브류어리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빨간색 벽돌 건물은 들어가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브류어의 손길이 필요한 이곳은 일종의 맥주 ‘실험실(Laboratory)’이다.
푸른 잔디밭과 대리석이 맞물린 마당을 지나 거대한 철문을 열고 들어간다. 앤틱한 디자인의 의자 뒤로 보이는 탱크는 출격 명령을 기다리는 로봇처럼 보인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이곳의 주소인 ‘원남산단로 97’을 상징하는 97개의 유리볼로 만들어졌다. 빨간 전선 끝에 몽글몽글 매달려 있는 모습은 맥주의 거품을 형상화했단다. 반대쪽 벽에는 ‘우리는 우리가 마시고 싶지 않은 맥주는 만들지 않습니다(We don’t brew beers that we don’t like to drink!)’라는 문구를 적어놨다. 부럽다. 나도 쓰고 싶은 기사만 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비록 단순한 문구지만 맥주 품질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이곳의 인테리어는 여러가지 요소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차가운 느낌의 대리석 바닥과 따듯한 느낌을 주는 새빨간 벽돌 그리고 콘크리트 벽이 이어진다. 유리창 안쪽으로는 맥주가 만들어지는 스테인리스 탱크도 보인다. 곳곳에 맥주와 관련된 문구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너른 대지 위에 투박하게 지어진 맥주 공장이지만 단순히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지어진 건물은 아닌 듯하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맥주 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11월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단순한 브류어리가 아니라 복합문화 공간으로의 변신을 시도 중이다.
다시 한 번 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공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빵집에서 맡을 수 있는 고소한 곡물의 향이다. 어렸을 적 엄마가 술빵을 만들어 주셨을 때 부엌에서 나던 냄새 같기도하다. 아마도 보리가 당화되면서 나는 향이리라.
맥주를 만드는 공간은 드라이존, 핫존, 그리고 콜드존 이렇게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드라이존에서는 보리의 싹을 틔워 맥아(malt)를 분쇄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름처럼 이곳은 항상 낮은 습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곳이라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 청소도 오직 진공청소기로만 한다고. 분쇄기 반대쪽에는 재미있는 문구가 보인다. ’와인에는 지혜가, 맥주에는 자유가, 물에는 박테리아가 있나니(In wine there is wisdom, in beer there is freedom, in water there is bacteria)’ 미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그는 엄청난 주당임이 틀림없다.
드라이존에서 분쇄된 맥아는 관을 통해 핫존으로 넘어간다. 홉과 아로마가 첨가되고 이 과정에서 맥주의 맛과 향이 결정된다. 곡물의 당을 녹여내고, 살균을 위해 끓이고, 홉과 아로마를 더한 후 발효가 이루어지도록 온도를 낮추는 작업 모두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핫존에서는 MIT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애플에서 스티브 잡스와 일을 했던 마크 헤이먼(Mark Hamon)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브류어라니 독특한 이력이다. 마크는 원래 해군이 되려고 했다. 입대 전 6개월이란 시간 동안 근처의 맥주 양조장에서 일했는데 이때 맥주의 매력에 푹 빠져 해군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맥주 만드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큰 스테인리스 통을 분주하게 오가며, 시간을 재고 탱크의 뚜껑을 열어 상태를 확인한다. 그의 모습은 마치 아주 손이 많이 가는 아기를 돌보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마크는 이곳에서 상주하며 맥주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나의 존재를 눈치챈 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Hello!’ 그의 따듯한 미소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따듯해 보이는 그가 만드는 맥주는 어떤 맛일지 많이 궁금해졌다.
핫존에서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 맥즙은 파이프를 통해 마지막 단계인 콜드존으로 넘어간다. 맥주의 발효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하루 2,000리터의 맥주가 생산된다. 병으로 따지면 4,500병 정도의 양이다. ‘저 안에서 맥주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 시절을 견디고 있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자, 이제 드디어 맥주를 맛볼 차례다. 맥주는 이곳 탭룸에서 마실 수 있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의자가 정갈하게 놓여있는 이곳은 가벼운 분위기에서 맥주를 즐길 수 있도록 잘 꾸며놨다. 크래프트브류어리에서 만들어진 맥주 말고도, 음성 현지의 재료를 이용한 간단한 요깃거리도 먹을 수 있다.
[시음한 맥주는 왼쪽부터 순서대로 썸앤썸, 비하이, 허그미]
가장 먼저 이곳을 대표하는 썸앤썸과 비하이 그리고 허그미의 세 가지 맥주를 마셔봤다. 가장 라이트한 허그미부터 시작한다. 라이트한 밀맥주다. 잘 고른 몰트와 밀, 맥아를 기본으로 코리엔더와 오렌지 껍질을 넣어 만든 황금빛 맥주는 입안에 감기듯 목넘김이 좋아 누구나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비하이는 IPA맥주다. 알코올 도수 7%로 다른 것보다 2% 정도 더 세다. 강한 알코올향과 진한 몰트의 풍미가 느껴진다. 목에서 넘어간 후에도 입안에 맛이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다. 썸앤썸은 발렌타인 시즌에 맞춰 출시된 브라운 에일 맥주로 마크의 첫 번째 보틀 맥주라고 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풍미가 매력적이었다. 신선한 카카오잎을 첨가해 초콜릿, 커피, 견과류의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색이 진해 알코올 도수가 높고 쓴맛이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비하이보다 훨씬 더 마일드하다. 역시 사람이든 맥주든 겉모습만으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코스믹댄서, 비하이, 허그미, 썸앤썸, 도로시, 블랙 스완]
공기가 좋아서일까 술맛이 좋아서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술이 약한 편인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맥주를 좀 더 청했다. 두 번째 샘플링에는 코스믹 댄서, 도로시, 그리고 블랙 스완이 추가됐다. 코스믹 댄서는 귀한 홉을 넣어서인지 입안에서 온갖 향이 폭발하듯 터진다. 시트러스와 플로럴 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더운 여름날 마시고 싶은 맥주다. 블랙 스완에는 오렌지와 생강, 넛맥 등을 넣어 맛이 풍부하다. 도로시는 레드에일로 밸런스가 잘 잡혀있어 언제 어디서 마셔도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이쯤 마시고 보니 내 얼굴은 이미 벌겋고,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온다. 이때 바쁘게 일하던 마크가 잠깐 시간이 나 우리의 흥겨운 맥주 시식 자리에 동참했다. 부끄럽지만, 얼굴이 벌건 상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건 ‘취중인터뷰’다. 그에게 어떤 맥주를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다.
“맥주는 언제 어떤 음식과 함께 마시느냐에 따라 다양한 선택이 가능합니다. 몇 가지 추천하긴 했지만, 사실 어떤 법칙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마시고 싶은 맥주를 골라, 마음 내키는 대로 먹으면 돼요. 맥주는 그렇게 어려운 술이 아니잖아요?”
멋진 곳에서 맛있는 맥주를 잘 즐겼다. 아쉬운 마음에 이곳에서 판매하는 보틀 맥주도 양손 두둑이 사왔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다시 2시간을 운전해서 돌아가야 하지만(참고로 운전을 맡은 비운의 사나이P는 맥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이 맥주 맛을 다시 한 번 보러 오고 싶다. 다음엔 취재 같은 거 말고, 맥주를 좋아하는 친구와 나들이 가듯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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