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며 고인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조명했다.
교도통신은 김 전 대통령의 1927년 출생부터 1998년 대통령직을 퇴임할 때까지의 주요 이력을 전했다. 통신은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체포를 명하고 1980년 광주사건(5ㆍ18 민주화 운동) 등의 진상 규명을 꾀하는 등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민주화의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보도했다.
아사히 신문은 김 전 대통령을 군부 독재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1992년 당선으로 문민 정권을 부활시킨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또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 후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쥔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1983년 정치 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23일간 단식 투쟁도 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역사, 영토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에 강경한 발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2002년에는 와세다대 특명교수로 취임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역사 바로 세우기의 목적으로 서울에 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독도에 접안 시설을 건설했다고 소개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군에 저항’이라는 제목으로 김 전 대통령의 평전 형식의 기사를 보도에 눈길을 끌었다. 신문은 김 전 대통령이 과감한 행동력과 결단력으로 한국의 민주화에 이바지했으나 대통령으로서 혼란을 일으킨 적도 많았다고 전했다.
요미우리는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 시절 가택연금 상태의 단식 투쟁 등 민주화 운동을 벌였고 이것이 한국 민주화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또 고인이 취임 초기에 군 개혁이나 부정ㆍ부채 척결 등을 호소하며 알기 쉬운 정책을 제시했지만 일관성이 부족했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은 고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 투쟁의 동지인 동시에 경쟁자 관계를 유지했고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독재 체제를 비판해 제명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또 이를 계기로 일어난 폭동(부마 민주항쟁)이 박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의 간접적인 이유가 됐다고 평가했다.
한편 NHK는 김 전 대통령이 1994년 당시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과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으나 회담 직전 김 주석이 사망해 실현되지 못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