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 풍경] 마당과 마루의 추억

입력 2015-08-0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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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소설가)

누구나 한세상을 살며, 나이가 많거나 젊거나, 자기 혼자만 추억하고 꿈꾸는 조금은 넉넉한 공간으로서의 집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한 집이라면 그곳은 자기 혼자만의 공간인 듯하면서도 부모와 함께한 공간이고, 형제들과 함께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허물고 새 집을 지었지만, 대관령 아래의 옛집은 아주 오래전 할아버지가 지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지은 집으로 우리 5남매도 그 집에서 태어났다. 부르기를 ‘옛집’이라고 불러도 옛날 고가 형태의 집은 아니다. 그냥 오래된 시골 농가의 기와집인데, 그 집이 우리 형제들에게는 지금도 모든 집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집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 개념이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어떤 집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20년 전 아버지가 낡은 옛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그때 우리 형제들에게 새로 지을 집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나는 집 방향이나 마당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집 주변에 가득했던 나무들도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새 집을 짓고 나니 그것이 꼭 남의 집같이 여겨지는 불편한 점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옛집의 ‘서녘마루’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지었던 옛집은 열 칸짜리 기와집이었다. 마루는 처마를 따라 ㄱ자로 집의 반을 둘러싸듯 놓여 있었다. 남향 마당 쪽의 앞마루는 그냥 마루라고 불렀고, 서쪽 마루는 툇마루라는 말 대신에 꼭 ‘서녘마루’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새로 지은 양옥은 집 밖으로 따로 마루를 둘 필요가 없었다. 옛집의 마루보다 더 넓은 거실이 실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옛집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는 ‘서녘마루’가 없는 것이 생활에서보다는 마음속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옛집에는 마당과 방안의 중간 공간으로 마루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어릴 때 저마다 방에서보다 더 많이 공부를 한 곳도, 형제들이 놀다가 서로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고 다툰 곳도, 그리고 여름이면 저녁마다 방에서보다 먼저 설핏 잠이 들었던 곳도 바로 서녘마루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너대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을 읽었던 곳도 그곳이었으며, 그걸 읽으면서 그래, 이런 곳에 걸터앉아 큰바위 얼굴을 보고 그 바위로 마지막 햇살을 비추며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았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마루에 앉아 솔잎 사이로 부는 바람을 맞고, 솔잎 사이로 비추는 햇살과 솔잎 사이로 밀려드는 저녁노을을 보며 자랐는데, 어른이 되어 다시 지은 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지었는데도 마루가 사라지자 그 추억들도 함께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집에 대하여 나름대로 또 하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다음에 내가 만약 새로 집을 지으면 집 바깥에 꼭 서녘마루와 같은 공간을 만들 생각이다. 그곳은 방안도 아니고 마당도 아닌, 그 중간에 위치한 아주 특별한 사색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어서 도시의 베란다나 테라스와는 또 성격이 다르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솔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과 햇빛과 노을을 느끼며, 그런 자연이 우리에게 다시 옛시절의 추억을 말해주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휴가철이 되어도 어디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수십년째 이제는 마루도 없는 고향집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옛 추억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어린 시절의 추억보다 더 새롭고 넓은 세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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