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5월 5일 단오는 큰 명절이었다. 부채를 주고받는 것도 중요한 민속 중 하나다. 영·호남 지역에서 부채를 진상[端午進扇]하면 임금은 이를 신하들에게 하사했다[端午賜扇]. 신하들은 다시 일가친척과 친지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부채가 단오절선(端午節扇)이다. 고려시대에도 부채를 내려준 기록이 있는데, 조선 고종 31년(1894) 9월 3일 군국기무처가 폐지를 건의할 때까지 이 풍속이 지속됐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 4월 28일에 중국 사신 백언(白彦)이 단오사선 풍속에 관해 묻고 명나라에서는 그런 풍속이 있다며 은근히 부채를 요구했다. 이에 세종이 공조(工曹)에 명해 둥글부채 10자루, 쥘부채 88자루를 만들어 주게 했다. 같은 해 5월 4일에는 명나라의 두 사신에게 둥글부채 10자루와 쥘부채 80자루를 증정했다. 그 이후 중국 사신에게 단오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정착됐다.
단오의 단(端)은 첫 번째를 의미하고, 오(午)는 오(五), 곧 다섯과 뜻이 통한다. 원래 기수(奇數)를 양(陽), 우수(偶數)를 음(陰)으로 친다. 우리 조상들은 기수가 겹치는 3월 3일이나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중 단오는 연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하여 큰 명절로 여겼다. 중오(重五) 단양(端陽)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문종 때 편찬한 ‘고려사절요’에 이런 기록이 있다. “5월에 우(禑)가 석전(石戰) 놀이를 구경하려 하니 지신사(知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주상께서 보실 게 아닙니다’ 했다. 우가 싫어하여 어린놈들을 시켜서 존성을 구타했는데, 존성이 빨리 나가니 우가 탄환을 가지고 쏘았다. 단오가 되면 시정의 무뢰배들이 떼를 지어 좌우로 나뉘어 기왓장과 돌을 들고 서로 치거나 뒤섞여 짧은 몽둥이로 치고받는데, 이것을 석전이라 했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