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칼럼] ‘지덕체’에서 ‘체덕지’로

입력 2015-05-2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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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얼마 전 “요즘 어떤 운동을 하지?”라는 내 질문에 한 고3 수험생이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고3이 무슨 운동을 하겠어요? 고3 학생들은 체육시간에도 운동장 안 나가고 자습합니다.” 당시에는 그러냐며 웃고 넘어갔지만 이후 무언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답답함이 내 가슴 한쪽에 자리 잡았다.

우리는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건강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 준비에만 몰입하게 하는 우리 모습이, 멀리 보지 못하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현재의 황금알에 눈멀어 미래의 더 많은 황금알을 포기함으로써 지·덕·체의 교육을 ‘지’에서 멈추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 중심의 교육이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던 건 사실이다. 자원이 없는 한국이 지금과 같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 즉 교육에 대한 열정이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이런 지식 중심의 교육은 산업화 초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경제적으로 일류국가에 진입한 지금에는 걸맞지 않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 중심의 교육만으로는 ‘멀리’ 그리고 ‘오래’ 갈 수 없다. 덩치가 커진 한국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이끌어줄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

먼저 사회의 다양한 부문에서 양극화가 고착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심신의 스트레스가 과중해진 우리 사회에서 학생들의 심신을 건강하게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지·덕·체의 교육이 아닌 체·덕·지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은 부족한 체력을 정신력으로 채워 넣을 것을 요구해 왔고, 학생들은 그것에 순종했다. 그러나 정신력만으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미래 지향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체력을 강하게 길러주어야 한다.

다음으로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은 더 이상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고 휴대전화, 반도체 등 몇몇 산업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금까지는 앞에 가는 기업들을 열심히 따라가면 됐지만, 이제는 따라오는 기업들보다 앞서서 스스로 성장할 길을 개척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한국에 창의력은 육체적 힘만큼이나 새로운 세대에게 반드시 함양되어야 할 특성이다. 새롭게,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능력을 일컫는 창의력은 특히 연구개발 부문에 필요하다. 최첨단 투자사업의 설계 및 실행은 창의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창의적 사고에는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필수다. 나는 서울대 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신입생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전국에서 골고루 선발함으로써 전체 학생이 모든 지역을 골고루 대표할 수 있도록 하는 지역균형선발제도를 도입했다. 학생들과 교수진 모두에게 보다 광범위한 간접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사고에 도움이 되도록 한 것이다. 다양한 인재들이 모인 용광로에서 다양한 간접경험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자극하고, 지식을 전달받는 자가 아닌 지식의 창조자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끝으로 사람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묻는 일과 유리된 지식은, 한 번 써먹고 마는 소모품과 다를 바 없다. 한 개인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필경 남에게 질시와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는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덜 시키고 놀게 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으로 과외교습을 금지하고 학원의 심야교습을 금지하는 룰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미봉책에 불과하다. 지식 중심의 교육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다.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지·덕·체 교육이 ‘지’에서 멈춘 지 오래다. 지·덕·체 교육이 아닌 체·덕·지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 생각의 틀을 바꾸는 데에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체력과 창의력이 바탕이 된 교육이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주리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 속에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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