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세(甲午歲) 가 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거리다, 병신(丙申) 되면 못 가리.” 12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봉기할 때 부르던 노래다. 1894년(고종 31) 전북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1855~1895)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농민혁명운동을 일으켰다. 혁명은 병신년까지도 못 가고 실패했지만 혁명의 의기는 두 갑자가 흐른 지금도 청사에 빛난다.
전봉준의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해 흔히 녹두(綠豆)라고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선비농민’ 전봉준은 1893년 11월 고부군청에 찾아가 비리와 부정의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문전박대 당했다. 그 뒤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습격한 데 이어 3월 21일 봉기했다. 농민군은 전주성도 점령했으나 공주 우금치와 태인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했다. 옛 부하의 밀고로 12월에 체포된 전봉준은 모진 고문을 겪은 뒤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으로 숨졌다.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인데 어찌 반역죄를 적용하느냐”고 따졌던 그의 절명시(絶命詩)는 1974년 5월에야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爲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 소설가 김동리는 이렇게 번역했다. ‘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 편이더니/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백성 사랑 올바른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전봉준의 아버지는 고부향교의 임원인 장의(掌議)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하다가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을 거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몸이 망가진 끝에 결국 숨졌다. fused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