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시민단체는 B라는 기업을 규탄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B 기업은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채고 집회가 계획된 것과 같은 날짜와 장소에 허위로 집회신고를 냈다. 경찰은 B 기업이 먼저 집회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A 시민단체에 대해 집회 금지를 통고했고, A 단체는 결국 불법집회를 열 수 없어 집회를 포기했다.
앞으로는 먼저 선수를 쳐 특정 집회를 열지 못하게 하는 '편법 집회신고'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먼저 접수된 집회신고가 단순히 특정 집회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할 목적으로 이뤄졌다면 효력이 없다"는 첫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특히 노조가 여는 집회을 방해하기 위해 기업 측이 먼저 집회신고를 하는 일이 잦은 것을 감안하면 노동계의 집회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 11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환경운동연합 김종남(48) 사무총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먼저 신고된 집회가 다른 집회의 개최를 봉쇄하기 위한 집회신고임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 관할 경찰관서장은 단지 먼저 신고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뒤에 신고된 집회에 대해 집회금지 통고를 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 협의회'가 8차례에 걸쳐 집회신고를 했지만 그동안 단 한차례도 집회를 개최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집회 개최를 봉새하기 위해 신고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며 "단지 시간상 뒤에 신고됐다는 이유만으로 '환경운동연합'에 집회 금지 통고를 한 것은 위법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2009년 6월 남대문경찰서에 1000여명이 참석하는 4대강 사업 저지에 관한 옥외 집회 신고서를 제출했다. 남대문경찰서는 그러나 먼저 보수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협의회'가 집회신고를 같은 장소와 날짜에 먼저 했다는 이유로 '집회금지통고서'를 김씨에게 발송했다.
김씨는 "먼저 접수된 신고는 집회 방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므로 무효"고 주장하며 집회 개최를 강행했다. 검찰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했고, 1·2심은 "먼저 집회신고가 된 이상 경찰의 집회금지 통고는 적법하다"며 김 사무총장에게 유죄판결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비슷한 사례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12년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인 또다른 김모씨는 2012년 삼성SDI에서 일하다 사망한 이들의 직업병 인정과 보상을 촉구하기 위한 집회를 계획했다. 하지만 삼성SDI에서 미리 회사 근처 일대에 집회신고를 먼저 하는 바람에 김씨 등이 개최한 집회는 불법집회가 됐고, 결국 김씨는 벌금 70만원의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김선일 대법원 공보관은 "지난달 선고된 삼성SDI 집회 판결은 이번 판결과 사실관계만 비슷할 뿐, 쟁점은 달랐던 사안"이라며 "두 판결이 서로 모순되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