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한무제도 시행했다. ‘인기고속’(因其故俗·그 나라의 풍속에 따른다)이다. 한무제는 각국의 제도, 풍속을 존중하고 세금도 걷지 않았다. 현대 중국보다 차라리 나은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가을 신간 ‘사라진 홍콩’을 낸 류영하 교수(백석대·중국어학)는 철학자 헤겔의 경구를 인용했다. 일국양제 본색이 드러났는데도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한무제의 충신 김일제는 행실이 불량한 아들들의 부덕이 후환이 될까 염려해 직접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 저는 김일제와 같은 미리 내다보는 현명함이 없고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출전 후한서(後漢書) 양표전(楊彪傳).
☆ 시사상식 / 바나나 공화국
‘마지막 잎새’ 작가 오 헨리가 단편 ‘양배추와 왕들’에서 중남미의...
한무제(漢武帝)는 월씨(月氏)와 손잡고 흉노를 칠 계획으로 사신을 공모했다. 이때 뽑힌 장건(張騫)이 수행원 백여 명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으나 흉노에게 잡혔다. 흉노에게 호감을 산 그는 장가도 들어 아들까지 낳고 그들과 함께 살았다. 10년이 지나 처자와 일행을 데리고 탈출해 월지에 도착해 무제의 뜻을 전했으나 왕은 부정적이었다. 장건은 단념하지 않고...
중국 한무제(漢武帝) 때 음악을 관장하는 협률도위(協律都尉) 이연년(李延年)이 ‘가인가(佳人歌)’라는 노래를 불렀다. “북쪽에 아름다운 여인 있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네/ 눈길 한 번에 성이 기울고, 눈길 두 번에 나라가 기우네[一顧傾人城兮 再顧傾人國兮]/ 성을 기울게 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함을 어찌 모르리오만 아름다운 여인은 두 번 다시 얻기...
한무제(漢武帝)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항복한 이릉(李陵)을 논죄할 때 사마천(司馬遷)이 변호에 나섰다. 화난 무제가 그를 궁형(宮刑)에 처했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궁형을 당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네만 나 죽는 일쯤은 ‘소 아홉 마리에서 빠진 털 하나’와 같으니 죽어 봤자 개미 한 마리가 없어진 듯, 누구도...
곽광은 한무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8살 소제(昭帝)를 세웠고, 소제가 죽은 후 계승한 창읍왕(昌邑王)을 행실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임금의 자리에 세웠다. 그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선제가 즉위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하러 갈 때, 그의 호위를 받는 것이 마치 가시를 등에 진 것과 같이 불편했다. 곽광은 후일 자기 딸을 선제의...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천자의 재단(裁斷)에 맡겨야 한다고 주청하는 바람에 토론이 중단되자 한무제가 그를 꾸짖으며 한 말. “그대와 함께 대머리 늙은이를 해치우려 했는데, 어째서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이쪽저쪽 살피는 쥐새끼처럼 처신했던 거요?[與長孺共一老禿翁 何爲首鼠兩端].”
☆ 시사상식 / 아폴로신드롬
뛰어난 인재들만 모인 집단이 오히려 성과가...
한무제(漢武帝)의 어머니도 두 번 결혼했다. 그리고 진시황이 생모 조희(趙姬)와 여불위(呂不韋) 사이의 ‘사통(私通)’으로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출생의 비밀’이다.
이렇게 문란하기 짝이 없었던 시대에서 본인이 일종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진시황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수절(守節)’한 그녀를 대단히 높이...
이 길은 AD 139년 장건(張騫)이 한무제(漢武帝)의 명을 받아 서역으로 떠났다가 흉노에 포로로 잡히는 등 천신만고 끝에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개척된 길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느낀 점은, 첫째 중국은 대국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몸으로 재확인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과거에도 중국은 우리나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고대 중국의...
한무제 때 외척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편을 들던 장군 관부(灌夫)가 실수를 저지르자 두영의 정적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그를 옥에 가두고 여러 죄를 씌워 사형에 처하려 했다.
이때 두영이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관부의 처리가 조신들의 공론에 부쳐졌다.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천자의 재단(裁斷)에 맡겨야 한다고 주청하자 한무제는 신하들의 어정쩡한...
나중에 한무제가 사마상여의 글을 읽고 크게 기뻐해 도성으로 불러 벼슬을 내렸다. 사마상여는 필명을 크게 떨치며 일세의 대문장으로 우뚝 섰고, 탁씨 집안에서도 더 이상 그를 깔보지 못했다.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은 많은 드라마 연극 영화 만화로 만들어졌다. 이들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 가도벽립(家徒壁立), 가도사벽(家徒四壁)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