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따라 그릴 만큼 미술적 재능을 보였고, 숙종 때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그녀의 그림에 발문을 썼다. 문예적 재능도 남달라 ‘사친(思親)’을 비롯해 한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녀는 오늘 유명을 달리했다. 1504~1551.
☆ 고사성어 /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이 근본이고 재물은 맨 나중이라는 말. 대학(大學) 10장에 나온다. “다스리는...
경주 양동에서 출생한 회재 이언적은 이황, 이이, 송시열 등과 더불어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종사, 정치가로서 최고의 영예인 종묘배향을 동시에 이룬 인물이다. 그에게도 영욕의 세월이 있어, 마흔 살에 정쟁에서 패하여 낙향했다. 그는 고향집이 아닌 인근의 안강으로 가서 지냈다.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은 북송의 학자 사마광이 은거했던 독락원(獨樂園)에서...
자발적 오랑캐가 견뎌야했던 수모는 송시열이라는 걸출한 성리학자(라 쓰고 사대주의자라고 읽는다) 덕분에 병자호란을 겪는 흑역사에서 절정에 달했다. 한족을 아버지로 삼고 스스로 동쪽 오랑캐임을 자처했던 조선은 오랑캐중에서도 하급 오랑캐 취급하던 여진족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짓찧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국전쟁 당시 다된 통일에 재 뿌린...
조선 유학자 송시열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가르침을 화두로 삼았다. 고대 아테네 철학자 솔론도 “배울 수만 있다면 그 순간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여기엔 맥락이 있다. 조카 노래에 반해 ‘어찌 음정을 잡느냐’며 배움을 청하다 반응이 삐딱하자 황망히 답한 것이다. 앞서 솔론 조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고...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명언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을 주로 삼아라.”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다. 주자학의 대가인 그는 이이의 학통을 계승해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뤘다.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해...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비판한 그의 사상은 소론 세력들에 의해 전승 발전되어 노론 일당 전제 체제 아래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는 오늘 숨졌다. 1629~1714.
☆ 고사성어 / 감택용서(闞澤傭書)
‘감택이 책을 빌려 베껴주면서 공부하다’라는 말.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스스로 공부해 성공한 사람이나 그런...
우암사적공원은 조선 후기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야. 봄이 되면 벚꽃이 아름다운 곳인데, 공원 안쪽에는 대전시 유형문화재 4호인 '남간정사'가 있어.
다행히 사고로 무너진 정문은 문화재는 아니고 1996년 지어진 건물이라고 해.
댕댕이 야구 천재 '랜디'
SSG 랜더스가 30일 새로운 마스코트를 공개했어.
새 마스코트의...
파평 윤씨 25세손인 그는 소론의 영수로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맞섰다. 블로거들은 윤증의 이런 면모를 윤 총장의 행적과 비교하고 있다. 윤 총장은 파평 윤씨 35세손이다.
어디 학연, 혈연뿐일까? 지연도 윤석열 대망론에서 빠질 수 없다. 윤 총장 본인은 서울 출생이지만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는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공주가 지역구인...
선조와 영의정 유영경의 독대(1607년), 효종과 이조판서 송시열의 기해독대(1659년), 숙종과 좌의정 이이명의 정유독대(1717년)만 기록돼 있다. 유영경과 이이명의 독대는 훗날 정쟁의 씨앗이 돼 결국 사약을 받고 죽는다. 송시열도 독대 이후 권력의 최고 정점에서 현종, 숙종 때까지 두 임금을 모시지만 결국 세자 책봉 문제로 사약을 받는다.
이처럼 임금과의 독대가 좋은...
송 장관은 우암 송시열의 13대손으로 알려졌다. 고조부는 구한말 을사늑약 이후 자결한 애국지사 송병선이다. 현재 가족관계는 부인 구자정 씨와 슬하에 1녀가 있다. 1995년 암으로 투병하던 차녀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이력
△1949년 충남 논산 △대전고 △해사 27기 △경남대 경영대학원 △고려대 경영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함대사령관...
이런 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계기는 율곡 학통을 계승한 송시열(宋時烈) 덕분이다. 송시열은 사임당이 그린 난초 그림의 발문에 “이 그림은 사람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워 사람 힘을 빌려서 된 것이 아니다…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실 만하다”고 적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에 ‘한국의 어머니’로 재탄생되어...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므로 기년설이 옳다고 하자 윤휴(尹?)는 효종이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했다. 결국 송시열이 기년설을 고집해 기년복이 지켜졌고, 이로 인해 서인 집권이 공고해졌다.
1674년(현종 15) 효종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 장씨(張氏)가 죽자 서인과 남인 간에 복상 문제가 다시 시작되었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을, 남인은...
그 시작은 율곡의 수제자인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면서부터입니다. 신사임당의 뛰어난 산수화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고 ‘어머니’ 이미지에 어울리는 초충도(草蟲圖)를 높이 평가했죠. 그렇게 신사임당은 ‘유교적 어머니’ 로 비유됐습니다.
사실 현모양처라는 단어도 우리 고유의 말은 아닙니다. 원래 일본에서...
이 과정에서 송시열과 허적 등 양 붕당의 수장들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사사된다. 결국 세 차례 환국을 통해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다.
왕권 강화와 더불어 숙종이 지향했던 것은 부국강병이었다. 상평통보를 발행해 농업뿐이던 경제를 상공업 중심으로 바꿨고, 대동법을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해 민생 안정을 꾀했다. 국방에도 힘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문인 이동보(李同甫·1655~1724, 동보는 자. 본명 喜朝)에게 보낸 편지 답신에도 이 말이 나온다. 3남의 관례(冠禮)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저런 점을 유념하며 예식을 치르니 법도가 모두 연관이 있는지라 이 늙은이의 심력(心力) 목력(目力)이 다해 정신이 혼미해졌네. 하는 수 없이 제자인 치도(致道: 권상하)에게 예식을 모두 위임하니 내 벗 또한...
우리나라의 우암 송시열도 송자로 통했지만.
순자는 송자의 비투론(非鬪論)이 틀려먹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싸우는 원인을 그는 남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사람들이 비록 모욕을 당하더라도 욕됨을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싸움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순자가 보기에 싸움의 원인은 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기가 싫어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 사림세력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에 누설했다. 이후 유배됐다가 아들 익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됐다.
이에 네티즌은 "'화정' 조민기, 김자점처럼 곧 처형되겠군" "'화정' 조민기, 김자점의 삶이 그랬구나" "'화정' 조민기 간신배 김자점 연기 기대된다"등의 반응을 보였다.
*‘역사저널 그날’ 치마폭 카리스마 숙종, 현종 위한 행장 재조명…송시열 행적 문제
‘역사저널 그날’ 치마폭 카리스마 숙종이 현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행장이 재조명된다.
6일 밤 9시 40분 방송되는 KBS 1TV 시사ㆍ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치마폭에 가려진 카리스마 숙종, 왕이 되다’ 편이 전파를 탄다.
이날 ‘역사저널 그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