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때문에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민들은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특히 고등학생 정도의 자식을 둔 부모들은 이런 사회에서 자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불과 얼마 전에도 해병대 캠프 때문에 귀중한 우리 자식들 목숨이 사라졌는데, 이번에 또 다시 이런 참사가 터졌으니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엔 윤 일병 사건이 터졌다.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대학을 무사히 보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이 정도 되면 아이 낳고 기르는 과정이 거의 공포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국가적으로 인구 감소가 큰 문제이니 아이 많이 낳으라고 얘기한다면 이는 파렴치한 일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아이 낳고 기르는 데 교육비가 많이 들어 더 낳기가 어렵다는 식의 항변은 사치스러운 주장이다.
교육비 문제는 고사하고, 우리 아이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국가나 정부가 그렇게 인구 감소를 걱정한다면 아이를 마음 놓고 키울 수 있는 사회부터 먼저 만들어야 한다. 물론 정부는 이번에도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하고, 장관이 사과하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지만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다. 일이 터지면 항상 주무부서 장관이 사과하고 또 대책을 강구한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국민들은 정부의 말을 전혀 신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우리 아이만은 괜찮기를 빌 수밖에 없는 지극히 무기력한 상황에 온 국민이 빠져 있다.
국민의 정부에 대한 이런 신뢰 상실은 상당히 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게 만든다. 사회적 관계에서의 신뢰는 바로 사회자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회자본은 1800년대 말 알렉산더 드 토크빌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사회과학이 이 용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해, 지금은 시민사회를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바로 이 용어의 핵심에는 사회적 신뢰가 존재한다.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만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사회자본은 정부와 국민 사이의 신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신뢰관계를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리 국가개조를 한다고 외쳐도 국민들이 정부 자체를 믿지 못할 것임은 당연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정부는 아무런 일도 추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정부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신뢰 상실은 비단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골이 오히려 더 깊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도 사건이 터지면 금방이라도 어마어마한 대책을 내놓을 것 같다가도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몰두해서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정부도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갈등 조정 기능이 있는 정치권도 믿을 수 없는 아주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먼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부에 대해 항의하고 정치권에 대해서는 다음 번 선거에서 매서운 맛을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 유권자들이 말랑말랑하게 보이니까 정치권도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부도 국민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좀 무서워지자. 그래야만 우리 자식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