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의 그윽한 꽃향기에 취해 제주도에 머문 지 달포. 향기는 그래서 취각으로 남는 게 아니라 미련으로 남는가 보다. 필자는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찾아가는 길에 내친김에 조선시대부터 남아 있던 귤나무 노거수를 찾아봤다. 제주도에 와서 한란도 중요하지만 어찌 추사와 귤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제주시 애월읍내를 지나 묻고 물어 광량리의 한 농가를 찾았다. 주인장을 큰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 이웃집의 양해를 얻어 집안에 들어가니 그리 큰 나무가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집 담 너머에 작은 귤밭이 있고 그 집 뒤에 붙어 있는 노거수 ‘동정귤(洞庭橘)’이 보였다. 조선시대 진상품 귤 9종류 가운데 하나. 이 나무의 수령이 250년이 넘는다고 한다. 땅 바로 위 나무 둥치의 둘레는 두 아름이 넘고 이 바닥에서 다시 네 줄기로 자란 귤나무는 풍상을 겪은 모습 그대로다. 4·3항쟁 당시 북쪽의 가지가 불로 인해 고사했으며 다른 큰 줄기의 가슴에는 큰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노령에도 열매가 실하게 열려 있었다. 이 귤은 지금이야 맛과 향의 순위에서 뒤처지지만 귤류 공물 중 상급에 꼽혔다.
태종 12년(1412년) 왕은 종묘 시절에 맞는 음식을 올리라고 명하셨다. 즉 2월에는 얼음, 3월에는 고사리, 4월에는 송어, 5월에는 보리·죽순·앵도·살구, 6월에는 능금·가지·동과, 7월에는 서직·조, 8월에는 연어·벼·밤, 9월에는 기러기·대추·배, 10월에는 감귤, 11월에는 고니, 12월에는 물고기·토끼였다.
그러나 세종은 제주의 진상품, 곧 동정귤(洞庭橘), 유감(乳柑), 청귤(靑橘) 등을 진상하는 것은 면제하도록 명한 적도 있다.
왜 그랬을까? 1427년(세종 9년) 6월 제주도 찰방 김위민은 몇 가지 폐단을 임금께 아뢴다.
“민간에서 과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앞으로 그 이익을 얻어 자손을 위한 계획 아래 하는 것이며, 또 민가에서 과일을 거두지 못하게 금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법령이 있는데, 지방관이 민가의 감귤을 진상한다고 칭탁하고 나무를 세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겨우 맺을 만하면 열매 수를 세어 감독해 봉해 두고, 혹시 그 집 주인이 따는 일이 있으면 절도죄로 몰아대고 전부 관에서 가져가므로, 백성은 이익을 보지 못해 서로가 원망하고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이젠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귤, 이제는 착취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