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같이 정부가 나서서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것은 이젠 맞지 않다. 정부는 거시정책 안정, 난립했던 규제 줄이기, 공정경쟁 질서 확립 등 크게 세 가지만 해주면 된다.”
이승훈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최근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면서 경제정책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이같이 정리했다. 과거처럼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이 아닌, 경제주체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포퓰리즘이라는 비판까지 듣고 있는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바람에 대해 “무조건 경제에 개입하는 건 정치가 아니다”라며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큰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 정치권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최근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에 대해선 “선진국 진입 문턱에 있는 이 시점에서 저성장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한국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현재 한국경제 저성장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동아시아 공산품의 주 시장인 미국과 유럽 시장의 침체다. 둘째는 한국경제가 이젠 10%대 고성장을 할 수 있는 시기를 지났다는 점이다. 과거 한국은 선진국들이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제품을 저렴하게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이미 입증된 길이었다. 하지만 이젠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들이 크게 성장하면서 따라잡을 상대가 없어졌다. 우리가 직접 세계 시장을 선도할 상품을 먼저 개발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경우 연구개발에 많이 투자해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과거 선진국들의 성장률이 3~4%에 그쳤던 이유다. 현재 한국경제는 이런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이다. 우리도 (선진국들과 같이) 3~4% 성장을 벗어날 수 없다. 과거 10% 성장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이젠 접고 저성장에 대한 생각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현오석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박근혜 정부 ‘경제팀’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들이 강해지고 있다. 경제팀을 평가한다면.
“100일 정도 지난 이 시점에서 잘한다 잘못한다 평가하기엔 너무 이르다. 지금은 단기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큰 배가 순항 중 크게 선회하는 식의 장기적 대응책이 필요하다. 우선 새 정부의 창조경제는 과거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엔 정부가 앞서서 끌고 가며 규제와 통제를 통해 낭비 없이 커왔다. 그대로만 가면 경제성장은 뒤따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정부가 나서서 과거처럼 주도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통화정책 안정화 정도는 필요하지만 산업정책에선 한 발 물러서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곳에 들어가 있던 정부의 손길을 빼는 것도 중요하다. 정부는 크게 세 가지만 잘 다루면 된다. 거시경제 안정, 난립했던 규제 걷기, 창의혁신 성공기업들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공정경쟁 질서 확립하기 등이다. 그나마 한국경제가 이 시대에 4~5%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과거와 같이 정부가 끌고 가는 건 안 된다.”
△경기 부진이 계속되면서 올해 정부의 세수 목표 달성이 가능하겠느냐는 우려의 시각이 많은데.
“증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이 증세를 안 하겠다고 선거 때 공약했지만 대다수 국민들도 이해할 거다. 크게 부담을 안 느껴도 되는데 처음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니깐 증세 논의조차도 못하고 있는 거다. 증세를 못하면 복지 역시 힘들다.”
△국회가 경제정책의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제와 관련, 정치권의 바람직한 역할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경제에 개입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게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어떻게 돌아야 하는지 틀 자체를 만들어주는 게 정치권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국회에서 의결한 방식대로 하면 본질적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감 몰아주기다. 아마 국회에선 예를 들어 A재벌기업이 오너 2세의 지분이 많이 투입된 B계열사 제품을 많이 팔아주면 이를 일감 몰아주기로 이해하는 것 같다. 잘못된 이해다. 만일 B계열사가 만드는 제품의 품질이 좋고 A기업의 완제품 제작 시 꼭 필요한 것이면 부당한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다른 업체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B계열사 제품을 팔아주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누가 가장 손해를 볼까. 바로 A기업의 일반 주주들이다. 더 좋은 부품을 사용했으면 A기업의 실적이 좋아져서 이윤이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일반 주주들은 대부분 미리 보상받기를 포기한다. 그러면 재벌기업들은 이런 부당한 일들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좋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는 방법이 옳지 않은 것 같다. 앞서 얘기한 일반 주주들처럼 미리부터 포기한 집단들에 집단소송제든, 징벌적배상제든 스스로 들고 일어날 무기를 쥐어주면 해결이 보다 쉬울 것이다. 갑으로 불리는 집단들도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본다.”
△최근 잇단 대기업 세무조사 등 사정당국의 재계 압박 강도도 세지고 있는데.
“A기업이 영업을 해서 매출 1000억원을 기록하고 이 중 이익은 100억원이라고 치자. 그러나 탈세 혐의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게 되면 한 번에 매출액 전체에 맞먹는 1000억원을 다 뺏길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세금 낸 것 이외에 추가로 세무조사 과징금을 맞지 않으면 이는 고스란히 기업의 이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기업 내 조직에서 법무가 최우선이고, 사내 변호사도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무조사를 할 때 우리 기업들의 관심이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보다 세무조사 쪽으로 더 쏠릴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시장경제 지킴이, 전력산업구조개편 이끌기도
이승훈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학계의 대표적 시장경제론자로 꼽힌다. 2000년대 초반엔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이끈 전력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는 전자공학과 경제학을 두루 거친 그의 전공과도 맞닿아 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교수는 19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열성적이었던 탓에 학업에 몰두하지는 못했다는 게 이 교수의 회고다. 이 교수는 “대학 4학년 때 시위를 주도하면서 이후 취직도 못하게 됐고 다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경제학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7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시장경제 연구에 나섰다. 1976년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1977년 서울대 조교부터 시작, 사회과학연구원장까지 계속 모교에 몸담았다.
이 교수의 초기 연구분야는 산업구조론. 이어 1990년대부터 개발도상국 경제 발전과 대기업 문제 등 현실 경제와 관련된 주제를 주로 연구했다. 2009년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시장발전과 경제개발’이란 저서로 시장경제대상 출판부문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경제개발을 수치상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것보다는 생산량 확대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를 위해선 분업구조와 분업능력 등을 선진국 수준으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대 초반엔 정부가 단계적 민영화를 목표로 한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1단계 계획을 주도했다. 한국전력공사와 각 발전회사, 한국수력원자력 등을 분할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 교수는 2001년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초대 전기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전력산업 구조개편 등의 심의·조정·조사를 주도했다.
2011년 9·15 순환단전 사태 발발 직후엔 정부가 민간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한 ‘전력위기대응체계개선 태스크포스’의 단장을 맡기도 했다. 이 교수는 TF에서 국내 전력위기 대응 시스템 개선, 전력거래소와 한전의 역할 재검토, 전기요금 체계 개편 등을 중점 검토했다. 현재 전력산업연구회 회원으로 전력산업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1945년 서울 출생 △1970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7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 박사 △1977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01년 산업자원부 전기위원회 위원장 △2011년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현) △2011년 지식경제부 전력위기대응체계개선 태스크포스 단장 △2011년 전력산업연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