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도 중산 등 가운데 중(中)자가 들어간 사회과학 용어는 대체로 애매모호하다. 실체가 잡힐 듯도 하지만 양극단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인지 딱 꼬집어 규정하기가 만만치 않아 사람마다, 나라마다 설명이 달라지곤 한다.
그런데도 모범생 같은 이미지를 확 깨는,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3개국 모두 중산층의 필수 덕목으로 불의가 창궐하면 분연히 일어설 것을 꼽고 있다. 모두가 분노하는 일에 의연히 참여할 것(프랑스), 불의 불평 불법에 마땅히 대처할 것(영국),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미국) 등 중산층이 시민사회를 지키는 버팀목이 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중산층의 DNA에 저항정신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브라질과 터키 등 잘 나가던 신흥국에 이르기까지 시위대의 물결이 지구촌에 넘실대고 있다. 이를 두고 '역사의 종언'의 저자인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최근 “오늘날 세계적인 정치 혼란의 공통분모는 경제력과 교육수준이 높아진 중산층의 점증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정부의 실패”라고 분석했다. 그는 지난해 '역사의 미래'란 글에서 '중산층의 쇠퇴를 자유민주주가 견뎌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제왕이 됐지만 경제 양극화로 자유민주주의의 토양인 중산층이 급격하게 붕괴되면서 또 다른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등 G2가 최근 출구전략을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세계는 다시 붕괴의 위험에 떨고 있다. ‘금융의 지배’ 저자이며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터키, 브라질의 뒤를 잇는 시위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러면 우리는 ‘중산층의 분노’에서 안전한가? 매우 위험하다.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푹 떨어뜨릴 구멍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반면 고학력, 청년실업이 고질화되면서 중산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는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줄어들수록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이 떨어져 갈등이 커지고 경제가 활력을 잃는다.
돌이켜 보면 한국 사회는 1960년와 70년대, 지금보다 더 전면적인 중산층 붕괴를 경험했다. 박정희 정부가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을 전개하면서 자영농민이 대부분인 구 중산층은 파괴됐다. 대신 도시에서 기업과 정부를 중심으로 한 신 중산층이 한국경제의 주력으로 급성장해 한강의 기적을 주도하고 민주화도 이끌어내는 쾌거를 이뤘다.
악순환으로 이어질 법도 했던 1차 중산층 혁명을 성공스토리로 엮어낸 그 노하우는 지금도 유효하다. 논 팔고 소까지 팔아 자식을 공부시켜 신 중산층으로 키운 구 중산층 부모의 열성과 희생이 자양분 노릇을 했지만 정부의 전략적 접근과 추진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정부가 최근 발표한 ‘서비스산업 대책’에 눈길이 간다.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선호하는 분야인데다 고용과 생산 유발효과도 커 박근혜 정부의 중산층 70% 복원, 고용률 70% 달성 공약에도 힘을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제조업을 중시하던 개발 연대의 틀에서 벗어나 낙후된 서비스산업을 제조업 수준으로 육성하겠다는 취지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걱정스럽다. 당장 이번 대책에서 의료·법률·교육·금융 등 핵심 서비스 분야는 몽땅 빠졌다. 21세기에 걸맞은 신 중산층이 둥지를 틀며 2차 중산층 혁명을 이끌기 좋은 곳이다. 동시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이익단체가 반발하면 정치권과 부처까지 휩쓸려 온 나라가 북새통이 되는 초민감 분야이기도 하다. 현오석 부총리는 차례로 분야별 대책을 내놓겠다고 밝혔지만 왠지 NATO(No Action Talk Only, 실천 없는 말뿐)로 전락할 것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집권 초기의 정부다운 패기와 추진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박 대통령도 부친처럼 중산층 혁명에 성공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