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언론사 한국 특파원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부임 초기엔 한국 기자들이 심층해설 기사를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아 놀라웠지만 막상 와 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뉴스 거리를 처리하기도 바쁜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지난주말에도 그들은 청와대 대변인 전격 경질 소식을 본국에 타전하고 있었다. 온라인뉴스 유료화에 성공하며 전세계의 주목을 받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존 리딩 CEO 역시 1990년대 초반 한국 특파원이었다. 그는 한국 특파원 경험, 그리고 한국 인터넷 산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해외 언론인들이 기삿거리 넘치는 한국 특파원 자리를 경쟁적으로 노릴 정도로 60년 넘게 우리나라만큼 격동의 세월이 들이닥친 곳은 흔치 않다. 특히 5월은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초대형 사건으로 흘러 넘쳤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군사혁명, 광주민주화 항쟁은 이미 전세계인에게 각인된 지 오래다. 올해도 어김이 없다. 대통령 방미 중 벌어진 청와대 대변인 전격 경질이란 전대미문의 뉴스가 추가됐다.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30년 전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남겨졌던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은 곱씹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중국 민항기는 한중 수교 이후에나 쓸 수 있던 용어다. 당시 언론 표현은 ‘중공민항기’였다.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뚱의 아들을 비롯, 수만명 전사자를 낸 중공으로서는 한국과 수교는커녕 외교적 접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설성이었다. 여자 1명, 남자 5명으로 구성된 6인조 중공인 납치범들은 권총으로 협박하면서 민항기의 기수를 서울로 틀게 한다. 북한 영공을 통과했지만 아무런 제지없이 휴전선을 통과해 춘천 미군 공군기지에 불시착한다. 중공 정부의 대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어린이날 당일 중공은 외교 전문을 우리 외교 당국에 화급히 타전했다. 내용도 예상 밖이었다. 33명이란 대규모 교섭대표단을 보낼 테니 특별기 착륙 허가를 내달라는 읍소였다. 남조선 대신 대한민국이라고 적었다. 우리 정부도 중공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화답했다. 납치 후 불과 이틀 뒤인 5월 9일 철천지원수였던 두 나라 간 공식 협상 자리가 한국에서 마련됐다.
중국은 우리측 요구인 국내법에 따른 납치범 사법처리 등을 대부분 수용했다. 피랍 중국인 승객들은 5월 15일 최신 컬러 TV 등 선물을 가득 안고 귀국길에 올랐다. 비상 착륙에 따른 고장으로 수리가 필요하다며 중국 민항기 송환을 일부러 늦춘 것이다. 그 사이 우리 정부는 중국의 상류층인 납치승객들에게 최고급 호텔 숙박을 제공하면서 국내 주요 산업현장 시찰과 관광지 안내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맘껏 알렸다. 그 입소문 효과 덕인지 이듬해 대중 수출액은 2.3배나 늘었다고 한다.
몇해 전 중국의 초고속 외교 행보는 납치승객 중 중국 최고의 미사일 전문 연구원이 탑승했기 때문이란 국내 언론보도도 나온 바 있다. 중국 정부가 몸이 달아 우리측 요구를 거의 다 받아줄 만큼 미사일 전문가는 국보급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6인조 납치단에 의해 춘천에 불시착한 중공 민항기는 당시 외교가의 표현대로 '봉화새'였다. 10년도 지나지 않는 1992년 마침내 한중 간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명동 요지에 자리잡은 대사관에서 대만 외교관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짐을 쌌다.
한국전쟁 당시 총칼로 맞선 중국과의 외교적 접촉은 여객기 납치범에 의해 밤도둑처럼 우리 역사에 찾아들었다. 비록 러시아보다 2년 늦은 1992년에 양국간 정식 외교관계가 맺어졌지만 그 사이 베를린 장벽 붕괴, 러시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개방(글라스노스트) 등 사회주의권의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은 전세계 평화의 제전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국교 수립 후 21년차에 접어든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더욱 긴밀히 맺어져 있다. 당시 외교관계를 튼 실무자들은 국내 투자자들이 인사이트펀드에 상처받게 될지, 그럼에도 강남 큰손들이 또 다시 중국본토 ETF에 수억원 뭉칫돈을 투자하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