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치면 연예인에 해당할 이 광대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대중들을 열광시킨다. 영화‘왕의 남자’에서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 두 광대들이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저 세상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뼈있는 농담이 우리네 가슴에 팍팍 꽂혔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웃음 속에 담겨 있는 그 풍자란 기실 비극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희극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는 셈이다. 힘겨운 현실을 뒤틀어 한바탕 웃음으로 전화(轉化)시키는 것, 그래서 잠시 동안이나마 삶의 위안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웃음의 진정한 기능이 아니겠는가.
최근 ‘개그콘서트’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겨냥해 던진 몇 마디가 커다란 논란이 되었다. ‘갑을컴퍼니’의 최효종은 선거 공약만 난무했지 당선된 뒤 실제 된 일은 없다며 늘 국민들이 을 (乙)인 이유를 밝히면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제발 국민 갑갑하게 하지 말고 국민 모두 갑(甲)으로 만들어 달라.” 또 ‘용감한 녀석들’의 정태호 역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서민들을 위한 정책, 학생들을 위한 정책, 기업들을 위한 정책들 잘 지키길 바란다” 면서 “하지만 한 가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코미디’를 지목하기도 했다. “웃기는 것은 자신들이 할 테니 나랏일에나 신경 쓰라”는 것.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늘 하던 ‘개그콘서트’식의 풍자였지만 여기에 대한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이들의 발언에 공감을 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의 개그가 너무 정파적이고 편향적이라는 얘기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제 막 대통령 당선인이 된 이에게 보인 그들의‘태도’를 문제 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예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코미디는 자신들이 할 테니 나랏일에나 신경 쓰라”는 말을 그대로 뒤집어서 “개그맨들은 개그나 해라 정치는 하지 말고” 식의 반응들까지 나왔다.
아마도 풍자의 대상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게다. 하지만 코너의 내용은 비판보다는 “과거와 달리 잘 해달라”는 염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태도를 문제 삼지만 이것은 코미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일이다. 광대들이 판 위에서 코미디를 할 때는 그 대상이 왕이라고 해도 하대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웃음을 위해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같은 세상에 대통령을 여전히 왕 같은 존재로 여기는 건 시대착오가 아닐까. 대통령보다 더 높은 존재는 사실상 국민이다. 이 답답한 현실에서 국민이 진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무엇이 풍자의 대상이 되든 무슨 상관일까. 풍자는 그저 꽉 막힌 사회에 숨 쉴 작은 공간 하나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것을 갖고 마치 체제 전복이나 하는 양 앞서나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코미디는 힘없는 서민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일순간 공감대로 끌어내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대단히 가치 있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 광대들의 방식은 우리가 때로는 힘겨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겨내야 하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찰리 채플린이 그 어두운 대공황시대를 ‘모던타임즈’라는 걸작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광대들의 방식, 즉 코미디가 가진 특유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우스꽝스러운 몸 동작은 당시 공장 시스템의 비인간적인 면을 통렬히 비판했다.
비극적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자 희극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그 희극은 비극적 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처럼 광대들은 웃음을 주지만, 그 웃음 이면에는 반드시 비극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바탕 웃음을 통해 그 공감의 힘으로 비극을 희극으로 전화시킨다. 이것은 광대가 현실을 위로하고 바꾸는 힘이기도 하고, 더 크게 보면 결국은 죽음을 만나게 되는 모든 인간들이 가진 비극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광대, 그 꾸짖음을 우습게 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