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전철 3호선 안국역을 나와 현대 계동 사옥을 지나면 바로 옆에 담쟁이덩굴로 덮인 검은 벽돌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출입구도 복잡한 도로 쪽에 두지 않고 왼편 안쪽으로 깊이 끌어드렸기에 한자와 영문으로 된 큰 간판이 없었다면 흔한 업무용 건물이 아닌 듯하여 그대로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이 건물이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계를 이끌었던 고 김수근의 대표작으로 그가 만든 건축사 사무소 ‘공간’의 사옥이기도 합니다.
1977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증축되어 우리나라 현대 건축에 크게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건축에 관계하는 이들의 첫째가는 순례지이며 끊이지 않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겉에선 본 건물의 간결 단순함과 다르게 내부 구조는 몹시 독특하여 이름 그대로 ‘공간’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내어, 땅위에 넓게 펼쳐져있는 옛날 대감 집을 마치 몇 단의 수직 층위에 세련미 넘치게 쌓아놓은 것 같습니다.
주 재료인 벽돌이 바깥에서 실내까지 구분 없이 감아 돌고 뚜렷한 가름이 없는 공간은 또 다른 공간을 낳아 살아 움직이는 공간인 듯 합니다.
또한 1998년엔 그의 제자가 바로 옆에 그것과 대비되게 전통가옥을 현대적으로 풀이한 유리로 된 새로운 사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얼마 전 건축가들이 뽑은 한국 대표 건축물 베스트 1위에 옛 한강 정수장 시설을 버리지 않고 활용하여 생태공원으로 다시 탄생시킨 선유도 공원, 그 신구 ‘공간’ 사옥이 2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러모로 볼품이 없지마는 20번이 될까 말까한 왜소한 체격의 중학생 시절에는 형 같은 50번들이 공격해오거나 드센 40번들이 시비를 걸어오면 나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겐 내편이 되어 거들어주고 그들에게 맞서주는 믿음직한 친구가 있어 언제나 든든했습니다.
그는 명랑하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개구쟁이도 아니었고 조용하지만 소극적이거나 의기소침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졸업한 이후 가끔 편지도 나누었으며 만들고 그리는 손재주가 있어 서양화 추상 작품 같은 크리스마스 카드도 손수 만들어 보내오곤 했습니다.
그 적성에 맞게 건축을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공간’에 들어갔으므로 서로 가까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무척 기뻐했답니다.
덕분에 미로 같은 내부를 가진 그 건물을 인상 깊게 구경할 수 있었고 김수근이 심취해 있던 붉은 파벽돌의 마지막 작품인 불광동 성당 공사장도 현장 감독인 양 돌아봤습니다.
그러나 81년 겨울 이때쯤 나와 같이 보낸 태릉 스케이트장에서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그처럼 좋은 80 입행 동기들에게 나를 맡기고 그는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공간’을 다시 지나며 여태 소식을 모르는 성골 귀족 같았던 옛 친구가 그립습니다.
‘흘러가는’ 강물 위의 제3한강교나 ‘비 내리는’ 영동교 건너 상전벽해 강남땅엔 우리의 옛 추억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K씨와 이따금 들렀던 광화문 네거리에 오랜만에 섰지만 외국의 어느 거리에 와있는 듯 웬일인지 낯설기만 합니다.
정말로 떠나버린 가수의 노랫말대로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면 바꾸어 단장을 하거나 새로 솟은 많은 빌딩들이 날 밀어내고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 전 건물 양쪽 옆 벽을 뚫고 유리창을 낸 - 동경의 미 대사관 건물과 조금은 달라졌을 - 1980년 우리와 같이 세상에 나섰던 교보빌딩이 먼저 눈에 익습니다.
정부 청사 건너편 쌍둥이 건물 중 하나인 8층짜리 성조기 걸린 대사관이 마치 어린 학생 방학 공작물 같고 옛 국회의사당은 아이가 맞추어 놓은 조그만 나무 블록 같습니다.
새문안길, 털실 모자를 쓴 22미터짜리 망치질하는 사람 건너편에 낡고 빛깔 바랜 구세군 회관과 새문안 교회 건물은 다음에 찾아오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고
국제극장 자리에서 바라보는 황색 타일로 마감한 옛 동아일보사 건물이 아담하여 억지를 부려본다면 어느새 그것들은 자연과 하나가 된 듯 말 그대로 자연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