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42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이는 김 주석의 후계자로 추대된 후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왜곡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 위원장은 김 주석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처음 조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남동생 사망에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휴전 후 그는 평양에서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 동안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축적과 자질향상, 김일성의 인증 확보에 주력했다.
1974년 후계자 내정 직후엔 김일성주의를 정식화하고 김일성과 자신의 독재시스템 구축과 우상화를 선언했다. 이어 북한 각지에 김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부었다. 권력장악을 위해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에 몰두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 주석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했다.
1994년 7월8일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 위원장 시대가 열렸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 동안 ‘유훈통치’ 기간을 설정, 상을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다. 이듬해 10월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됐다. 이후 ‘선군정치’를 내세워 강력한 군부통치를 이어갔다.
그러나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위기감을 느낀 그는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보이기 시작, 내부적으로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경제적으론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2010년 5월 이후 1년여의 기간 세 차례 중국을 방문, 나진 특구 건설 등에 합의했으며 2011년 8월에는 러시아를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사망, 37년 북한 철권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