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아이 러브 스포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1>

입력 2010-01-12 15:07 수정 2010-01-1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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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레슬링 선수로 활약...레스링협회 회장 · IOC위원 역임...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역할 기대

한국은 세계적인 경영자 한 명을 얻은 대신, 좋은 레슬링 선수 한 명을 잃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시절 2년여 동안 레슬링 선수였고,1959년 전국대회에서 월터급에 출전해 입상까지 했었다.

“유소년 시절 이건희 전 회장은 평범했다”고 주장하는 <스물일곱 이건희처럼>의 작가 이지성씨 조차 이 전 회장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것에 대해“이건희가 보여준 최초의 공식적인 특별함”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이다.

이건희 전 회장이 레슬링 선수 활동을 그만두고 10여년의 시간이 지나 경영인의 길에 나선 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려놓은 것만 놓고 보면“그 편이 나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이건희 전 회장은 레슬링을 그만두게 된 것에 아쉬움이 컸던 듯하다.

그가 1982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아 1997년까지 15년 동안 4번의 연임을 한 것은 고교시절 레슬링 선수 활동에 대한 미련이 배어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다.

이건희 전 회장 관련 서적을 다수 출간한 홍하상씨는 그의 책 <이건희>에서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인 이건희 전 회장은 즐기는 운동도 승마, 스포츠카 운전 등 거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서“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 레슬링을 했던 그는 그 추억을 잊지 못해서인지 레슬링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전 회장 역시 1989년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레슬링부에서 쫓겨났다”고 표현하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한창 프로레슬링이 유행했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는 전혀 다르지만 그 영향을 받았는데, 유도할까 레슬링할까 하다 레슬링을 하게 됐죠. 2년 가까이 했는데 연습중에 부딪쳐서 왼쪽 눈썹 부근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레슬링을 하자면 흔한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걸 보시더니 깜짝 놀라 형제, 누나 총동원해서 교장한테 찾아가 빼달라고 해서 다음 날 제가 레슬링부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전 회장의 말대로 레슬링을 하다 보면 눈썹 부근이 찢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레슬링의 주요 기술에 정면 태글,옆 굴리기,안아 넘기기 등 상대편을 향해 손을 뻗는 동작이 많기 때문이다.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이건희 회장이 삼성 사기(社旗)를 인계 받고 있다.

◆ 레슬링 선수에서 IOC위원까지

선수의 꿈은 접었지만 레슬링은 그가 스포츠맨으로서 새로운 꿈을 갖게 했다. IOC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홍하상씨는“(IOC위원의) 꿈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가 훗날 레슬링협회 회장이 된 것이나 비인기 종목이었던 레슬링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2, 은2, 동5개라는 메달밭으로 가꿀 수 있었던 것도 고교시절 그가 레슬링을 했던 인연 때문”이라고 썼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건희 전 회장이 레슬링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일본에서 프로 레슬링 붐을 일으킨 한국계 레슬러 '역도산'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이건희 전 회장은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지시로 도쿄로 유학을 떠나 중학교 1학년까지 3년을 일본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 일본은 프로레슬링의 전성시대였다. 특히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건희 전 회장도 일본에 머물렀던 시절 수차례 역도산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역도산은 그가 일본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을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후진국으로 여기고 있어 민족차별이 심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건희 시대>라는 책에서 “이건희가‘어린 시절 일본에서 지낼 때 겪은 민족차별에 대한 분노와 외로움이 개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는데, 개와 더불어 영화, 기계, 스포츠 등에 대한 그의 집착은 모두 그의 고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년시절 이건희 전 회장과 레슬링의 인연이 그의 고독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레슬링에 대한 애정이 그의 리더십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이 가능하다.

고등학교 시절 우수한 레슬링 선수들은 뚜렷한 목표 지향점을 갖고 몰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제로 이건희 전 회장도 자신의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나도 학창시절 레슬링 선수로 매트위에서 뒹굴었던 스포츠인의 한 사람이자 IOC 위원으로서 누구 못지않게 스포츠를 아끼고 있다”고 말해 레슬링 선수시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레슬링은 금지 기술이나 경기규칙을 지키면서 1대 1로 맞부딪쳐 승부를 겨루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에 전력을 다하게 되는 스포츠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경영인생에서 가장 큰 승부수는 1974년 한국반도체의 인수를 통해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의 배경 중 하나에 ‘전력을 다했던’ 레슬링 선수시절의 경험이 포함돼 있었다고 하면 의외일까.

한국반도체 인수는 고 이병철 회장과 삼성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건희 전 회장의 사재를 털어서 진행됐다. 이처럼 ‘반도체 신화 삼성’을 만들 수 있었던 이건희 전 회장의 뚝심 속에는 스포츠를 통해 체득한 ‘전력을 다하면 된다’는 의지가 숨어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페어플레이 정신…기업 경영에 접목

이건희 전 회장은 레슬링을 비롯해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종종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승리보다 룰을 존중하는,즉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곳이 스포츠 사회”라면서“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또“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없이 승리할 수 없으며 모든 승리는 오랜 세월 선수, 코치, 감독이 삼위일체가 돼 묵묵히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성공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받기를 원했을지 모른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은“스포츠의 목적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움직여 시공의 벽을 뛰어 넘고, 계층과 이념의 벽을 허물어 인류애가 넘치는 열린사회, 열린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면서 “이건희 전 회장은 이런 스포츠 정신을 기업경영에 접목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경영마인드를 스포츠에 적용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또 사마란치 전IOC 위원장은 “이 회장의 일처리는 스포츠맨 답게 매사에 공정하고 당당하다”며“스포츠와 기업경영의 균형을 이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스포츠맨 이건희에게 스포츠와 경영은 분리돼 있지 않다. 지난해 삼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건희 전 회장을 정부가 사면 복권을 결정하고, 평창올림픽 유치 지원을 부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레슬링으로 부터 시작된 이건희 전 회장과 IOC와의 인연이 2010년 이 전 회장 자신과 삼성에 어떤 영향으로 나타날지 경제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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