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생명의 은인

입력 2024-10-2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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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

올해도 남자의 손엔 과일이 들려있었다. 한사코 사양해도 ‘생명의 은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주고 가시는 통에 또 귀한 선물을 받고 말았다. 과일을 한 입 베어 무니 새콤달콤한 맛이 입속에 퍼지며, 4년 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기 시작했다.

“등이 아파서 어젯밤엔 한숨도 못 잤어요.” 50대 남자는 등에 손을 대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등이 아픈데 왜 내과에 오셨냐는 질문에 물리치료도 받고 침도 맞아봤는데 호전이 없었고, 혹시 췌장에 이상이 있나 검사를 받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깰 정도로 아팠다는 말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전공의 시절 비슷한 증세로 왔던 환자였는데, 갑자기 심정지로 사망한 분의 모습이었다.

재빨리 흉부 CT 검사를 시행했고,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흉부에서 복부에 이르는 대동맥이 찢어져 파열 직전이었다. 일 분도 지체할 틈 없이 대학병원에 전화를 돌려 간신히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먼 거리를 가는 동안 혈관이 파열될 가능성이 있기에 만반의 준비를 끝낸 후, 두 손 모아 기도까지 드렸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돌이켜보니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정형외과로 돌려보냈더라면, 아니 수술 전에 대동맥이 파열이라도 되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최근 모 병원에서 대동맥 박리환자를 놓친 의사가 법적 처벌을 받았단 기사를 보았다. 대동맥박리는 드물고 증상도 다양해 초기엔 놓칠 수 있어, 의사에겐 위험부담이 큰 질환이다. 물론 환자의 생사가 달렸으니 더 신중히 여러 검사를 해야 하지만, 의심된다고 무턱대고 CT나 고가의 검사를 하면 ‘삭감’이란 철퇴를 맞기에 그조차 어려운 일이다.

2차 병원에서 내과 진료를 하다 보면 이런 복병을 드물게 만나곤 한다. 그때마다 무사히 피해 온 건 오늘처럼 운도 한몫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통할는지? 그러기에 좋아진 위중한 환자들을 보면 오히려 의사인 내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라고 말해야 할 듯도 하며, 필수과 의사의 고액 배상과 구속 기사가 잦아진 요즘엔 ‘생명의 은인’이란 말에 담긴 무게가 더 무겁고 두렵게만 다가온다.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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