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의들이 월초에 꼭 하는 것이 있다. 그건 청구라는 작업이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체계는 총 진료비의 30%를 환자 본인이 부담하고 나머지 70%를 보험공단에서 의료 기관에 지급하는 시스템이다. 청구란 70%의 의료비를 받기 위해 심평원에 지난 한 달 동안 우리 의원에서 진료한 내역을 보내는 작업이다. 덕분에 지난 한 달 동안의 의무 기록을 검토한다. 미비한 병명을 기입하고 특별한 검사와 투약을 해야 하는 사유들을 첨부한다. 대학병원이나 큰 병원에서는 청구 작업만 맡아서 하는 부서가 있지만 개원의들에게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때론 귀찮기도 하고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70%의 의료비가 들어와야 직원들 월급도 주고, 약도 사고, 장비도 수리한다.
그런데 무미건조한 청구 작업이 가끔 의미가 있어질 때가 있다. 지난 한 달간 우리 의원을 다녀간 환자들의 이름을 쭉 훑어볼 때이다. 고혈압, 당뇨로 오래 다닌 분들의 이름을 볼 때마다 한 분 한 분 얼굴도 같이 떠오른다. 십 년, 이십 년 꾸준히 약을 타러 오셨던 분들에 대한 감사가 나온다. 위중했던 환자의 이름이 나타나면 차트를 열고 그간의 경과를 확인한다. 필요하면 며칠 내로 다시 오시라고 전화해야겠다는 메모를 남긴다.
지난 한 달도 적절한 진단과 치료로 환자들의 병이 잘 나아 기뻐했을 때도 있었고, 개원가에서 다루기엔 벅차거나 나의 부족함으로 큰 병원에 의뢰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 뿌듯함과 안타까움이 청구 작업과 함께 상쇄되어 새로운 한 달을 시작하면 좋으련만 진료실에서 얻은 감정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 뿌듯함은 뿌듯함대로, 안타까움은 슬픔과 함께 그대로 남아 거기서부터 다시 한 달을 시작한다. 이렇게 새해가 되고 1월이면 지난 한 달의 감정이 아니라 지난 한 해의 감정을 안고 시작한다. 지난 한 해의 기쁨은 보람이 되어 힘을 내고, 지난 한 해의 안타까움과 슬픔은 기도가 되어서 또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가정의학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