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루아침에 ‘탐욕의 약탈자’가 돼 국내 자본시장과 재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도 있다. 현대자동차를 공격한 미국계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대표적이다. 순이익의 세 배가 넘는 배당, 경쟁사 대표의 사외이사 선임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고나와 시장을 흔들었다. 이들은 제2의 개회기인 국내 자본시장의 포식자일까, 조력자일까. 한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하는 외국계 자본들은 때론 탐욕의 약탈자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글로벌 자본, 한국경제의 한 축 담당
미국 기준금리가 5.50%에 달하는 등 고금리·고물가 기조가 쉽사리 꺾이지 않으면서 국내 PEF 운용사들이 자금 조달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있다. 반면 외국계 운용사나 전략적투자자(SI)들은 비교적 쉬운 달러 조달창구를 무기 삼아 국내 시장에서 영토를 넓히고, 대형 투자 건을 성공시키고 있다.
9월 야시르 오스만 알 루마이얀 아람코 회장 겸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총재가 한국시장을 찾았다. 사우디 국부펀드는 사우디 왕가가 출자해 조성한 국영 펀드로, 펀드 운용 규모는 7000억 달러(약 933조 원)에 이른다. ‘월가의 황제’·‘제2의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6월 방한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금융지주 회장 등을 만났다. 다이먼 회장은 파산 위기에 몰린 미국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을 전격 인수하며 글로벌 금융시장의 ‘구원투수’ 역할을 해 주목받았다. 세계 최대 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조셉 배 공동 CEO도 7월 방한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나 JP모건체이스 ,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과 같은 PEF외에도 미국계인 프리티움파트너스·누버거버먼자산운용·오차드·블랙스톤·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와 영국계 금융사인 맨그룹·콜러캐피털·안젤로 고든·플러그앤플레이 등도 최근 국내에 진출했다. 브룩필드자산운용(캐나다)·IMC증권(네덜란드)·노르딕캐피탈(노르웨이)·나틱시스은행(프랑스) 등도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이미 국내에 진출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 칼라일, 텍사스퍼시픽그룹, 베인캐피탈, CVC캐피탈,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 등은 투자인력 확충에 나서며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올해 초 스웨덴계 사모펀드인 EQT파트너스는 2조 원을 투자해 SK쉴더스 경영권을 확보했다. 또 지난해 캐나다계인 브룩필드자산운용은 1조 원을 들여 SK머티리얼즈에어플러스의 산업가스 설비를 인수했다. 같은 해 10월 싱가포르계 자산운용사 케펠인프라스트럭처트러스트도 7700억 원에 국내 폐기물 처리 업체 에코매니지먼트코리아(EMK)를 인수했다.
이처럼 외국계 사모펀드들이 M&A시장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는 이유로 최근 원화값이 하락하면서 환율 차에 따른 할인 효과가 꼽힌다. 지난 10년간 평균 원달러환율은 1130원대였지만 최근엔 1350원대를 훌쩍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큰 손’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M&A를 통해 기업구조조정을 이끌고,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처럼 부채 청구서에 허덕이는 기업이 많을 때는 더 큰 역할을 한다. 국내 자본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다.
버거킹이 한 예다. 2016년 홍콩계 사모펀드인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는 2100억 원에 버거킹을 사들였다. 이후 글로벌 버거킹 브랜드를 소유한 캐나다 레스토랑브랜즈인터내셔널(RBI)과 일본 내 버거킹의 매장 신설과 관리, 상품 개발 등 운영권을 총괄하는 ‘마스터 프랜차이즈’ 계약을 체결했다. 또 롯데GRS가 보유하던 일본 버거킹 지분 전량도 약 100억 원에 사들였다. 덕분에 매출은 2019년 5028억 원에서 코로나19 호재와 맞물려 2022년 7574억 원으로 급성장했다.
때론 탐욕의 약탈로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경영 효율화를 통해 가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기도 하지만, 때론 이들이 탐욕의 약탈자가 되는 일도 있다.
엘리엇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에 찬성투표 압력을 행사해 막대한 손해를 봤다며 2018년 7월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를 제기한 바 있다.
5년 가까운 법정공방 끝에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6월 20일 우리 정부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 원)를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법무부는 판정에 불복해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취소소송에 나섰지만, 승소 가능성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엘리엇 측도 “한국 정부가 낸 법적 절차는 결국 헛된 노력으로 끝날 것”이라며 “불복은 대한민국이 부패에 관용적인 나라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앞서 정부는 지금까지 엘리엇 사건을 포함해 총 3번의 ‘ ISDS’ 배상금 지급 판정을 받았다. 이란 다야니 일가가 2015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를 추진하던 과정에서 불거진 분쟁에서 730억 원,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약 3000억 원의 배상 책임을 안았다.
박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