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밌다”…‘오펜하이머’, 구원자 혹은 파괴자 [이슈크래커]

입력 2023-08-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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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AP연합뉴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AP연합뉴스)
올여름 극장가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 ‘오펜하이머’는 개봉과 동시에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데요. 개봉 3주 만인 10일 6억4900만 달러(한화 약 8644억 원)의 글로벌 흥행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는 ‘다크나이트’(2008),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 등을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작품 중 역대 다섯 번째로 많은 수익입니다.

한국에서도 벌써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개봉 전 영화표를 40만 장 넘게 판매한 건데요. 14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께 ‘오펜하이머’의 사전 예매량은 40만 장을 돌파했습니다. 사전 예매율은 무려 53.2%죠. 이는 역대 놀란 감독 작품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이에 실제 인물과 그 생애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담은 평전으로, 저자 카이 버드는 이 책으로 2006년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죠.

실존 인물을 조명한 전기를 원작으로 한 만큼, 관람 전 오펜하이머의 삶을 둘러본다면 공감과 몰입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전쟁을 끝낸 ‘구원자’와 세상에 혼돈을 가져온 ‘파괴자’라는 모순된 평을 동시에 듣는 오펜하이머, 그의 여정을 살펴봤습니다.

▲1945년 7월 16일(현지시간) 미국 뉴멕시코주 트리니티 시험장에서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됐다. (AP/연합뉴스)
▲1945년 7월 16일(현지시간) 미국 뉴멕시코주 트리니티 시험장에서 첫 번째 원자폭탄 실험이 진행됐다. (AP/연합뉴스)
괴팍한 과학자,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 책임자로…3년 만에 원자폭탄 개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세계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는 ‘핵분열 연쇄반응’ 연구에 열을 올렸는데요. 이를 활용하면 지금껏 없던 신무기,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겁니다. 모든 과학자가 어느 나라가 먼저 이를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인류 역사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죠.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실라르드 레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요구가 담긴 서한을 보냈습니다. 독일 나치 침략과 유대인 말살 등을 경험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는 여론이 나온데 따른 건데요. 이 서한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서명도 담겼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고, 1942년 사상 최대 규모의 국가 과학 프로젝트 중 하나인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미국 정부는 독일을 저지할 수 있는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20억 달러의 연구비와 13만 명의 인원을 투입,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 등에 비밀 연구단지를 짓고 연구에 나섰습니다. 캐나다, 영국을 포함해 30곳 이상의 대학과 시설에서 연구가 진행됐죠.

이 프로젝트를 이끈 연구 책임자가 바로 오펜하이머입니다. 그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노벨상 수상자 21명을 포함한 당대 최고 과학자 6000여 명을 이끌고 단 3년 만에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1904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양복 사업을 하는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집안의 후원과 명석한 두뇌로 1922년 하버드대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엔 당시 물리학의 중심지였던 영국 케임브리지 캐번디시연구소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죠.

그가 양자역학 등을 연구한 뛰어난 과학자는 맞지만, 사실 미군 상부들은 그의 연구 책임자 발탁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대학교수에게 복수하겠다며 책상에 독 사과를 두는 등 대학 시절부터 보여온 괴팍한 성격, 가족과 지인의 공산당 가입 이력 등 때문이었죠. 게다가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 이력도 없었고, 큰 규모의 연구소를 맡은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 미 육군의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은 오펜하이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1945년 7월 16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 코드명 ‘트리니티’에 성공합니다. 이어 그해 8월 6·9일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폭이 떨어졌죠. 이는 20만 명의 피폭 사망자를 낳으며 일본의 패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 공식 스틸컷. (사진제공=유니버셜 픽쳐스)
▲영화 ‘오펜하이머’ 공식 스틸컷. (사진제공=유니버셜 픽쳐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트리니티 실험 이후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음이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인도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인데요. 실험에서 원자폭탄의 위력을 접한 그는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기대감과 앞으로 닥쳐올 비극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겁니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몇몇 사람은 울었고, 몇몇은 웃었고, 대부분은 침묵했다”며 “우리는 앞으로 세상이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종전 후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중에 공개되고,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최고의 애국자로 추앙받았습니다. 1946년에는 공로 훈장을 받았죠.

그러나 정작 오펜하이머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1945년 10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겐 “제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다(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고 토로하기도 했죠. 자기 손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무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건데요. 트리니티 실험을 두 달 앞둔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항복한 바 있습니다. 사실 당시엔 핵을 가진 적대국이 없었다는 거죠. 오펜하이머는 이후 핵무기 반대론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군비 경쟁을 우려해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이끌고 개발 대신 규제를 권고하는가 하면, 수소폭탄 개발에 적극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는 냉전이 본격화하던 소련을 상대로 핵폭탄을 투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미국 원자력위원회 자문위원회 의장이라는 지위에서 ‘수소폭탄 반대’를 외치던 오펜하이머의 존재는 정부에 눈엣가시와도 같았겠죠.

그런데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합니다. 안 그래도 미국 내에선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에 오펜하이머는 과거 행적을 빌미로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심지어는 개발 정보를 빼돌린 소련 스파이라는 의심까지 받았습니다. 이 의심은 대중으로까지 확산했고, 오펜하이머는 결국 1954년 원자력위원회에서 물러나고 보안 정보에 접근하는 권한도 빼앗겼죠. 이는 오펜하이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말년에 프린스턴대 부설 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며 후학을 기르다 1967년 후두암에 걸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EPA/연합뉴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EPA/연합뉴스)
소련 스파이? 공산주의자?…사망 55년 후 벗겨진 ‘누명’

미 정부는 오펜하이머를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진짜 스파이는 따로 있었습니다. 독일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1년간 핵심 기밀 정보를 소련 측에 넘겼죠.

핵 기밀을 소련 측에 넘긴 적도, 공산당에 정식 입당한 적도 없었지만, 오펜하이머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전 참여한 교수 노조 활동, 사회주의 모임뿐 아니라 수십 년 전 기혼의 연인과 나눈 밀회, 가족과 지인의 공산당 가입 이력 등 모든 사생활이 청문회에서 언급되면서 사회 ·정치적으로 난도질 당했죠.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이런 오펜하이머를 고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에 빗대는데요.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듯, 인류에게 핵을 안긴 오펜하이머 역시 오명과 수치를 감내하며 몰락했다는 겁니다.

오펜하이머의 소련 스파이 혐의가 완전히 밝혀진 건 최근입니다. 미 에너지부는 지난해 12월 15일 성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보안 승인에 대한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에는 결함이 있었다”며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 55년이 지난 후였죠.

영화는 ‘구원자’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된 오펜하이머의 깊은 고뇌를 담아냅니다. 현재와 과거를 수차례 교차하고, 특정 장면에서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키우거나 줄이고, 배경이 일그러지는 연출을 사용하면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이죠. 또 단 한 컷의 컴퓨터그래픽(CG) 없이 거대한 버섯 모양의 불기둥이 밤하늘에 솟아오르는 모습을 실제와 유사하게 구현해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 장면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놀런 감독은 인터뷰에서 “나는 관객이 오펜하이머를 ‘판단’(judge)하기보다 ‘이해’(understand)하기 원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작품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구원자, 혹은 파괴자 한 방향으로 정의하기보다는 생전 그가 경험한 두려움, 혼란, 환희, 불안, 애정 등 수많은 감정을 그려내는데요. 날카로운 연출력과 함께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킬리언 머피 등 배우들의 열연도 빛을 발합니다.

‘오펜하이머’는 15일 개봉하며, 상영 시간은 180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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