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 어려워 마세요, 광주서 만나는 예술적 순간들

입력 2023-04-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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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족의 전통을 기리며 각종 과일과 채소를 돌 위에 올리고 예를 치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에드가 칼렐의 설치미술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며칠 간격으로 과일과 채소를 교체한다. (박꽃 기자 pgot@)
▲마야족의 전통을 기리며 각종 과일과 채소를 돌 위에 올리고 예를 치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에드가 칼렐의 설치미술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며칠 간격으로 과일과 채소를 교체한다. (박꽃 기자 pgot@)
광주비엔날레 시즌이 돌아왔다. 올해 제14회인 이번 비엔날레는 전 세계 작가 79명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실험적인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6일 저녁 개막식을 시작으로 7일부터 본 전시에 들어가 94일간 대장정에 오른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도덕경의 한 구절을 주제로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물이 상징하는 저항과 연대, 포용정신 등을 포괄하는 작품을 공개한다. 식민지와 원주민, 도시개발과 환경오염, 전쟁과 저항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동시대 사건이 주제에 녹아든 만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둔 관객이라면 현대미술을 잘 모르더라도 올해 전시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기본 소양은 이미 갖춘 셈이다.

굴 패총, 무화과나무, 과일ㆍ채소 재료로
▲굴 껍질을 잔뜩 쌓아 만든 무더기 위에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영상을 비추는 앨런 마이컬슨의 ‘패총’. 굴 껍질은 통영에서 공수했다. (박꽃 기자 pgot@)
▲굴 껍질을 잔뜩 쌓아 만든 무더기 위에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영상을 비추는 앨런 마이컬슨의 ‘패총’. 굴 껍질은 통영에서 공수했다. (박꽃 기자 pgot@)

굴 껍질을 잔뜩 쌓아 만든 무더기를 스크린 삼아 강을 따라 흐르는 배 영상을 비춘다. 앨런 마이컬슨의 ‘패총’은 독특한 재료로 눈길을 확실히 사로잡는다. 오랫동안 허드슨강 유역에 살았던 미국 원주민이 개발되기 이전의 강에서만 채취할 수 있었던 굴을 소재로 자신들의 역사와 현재를 은유한다. 무화과나무를 연필처럼 깎아 캔버스로 만든 산티아고 아르카니의 회화작품 ‘위토토 세계관’, 마야족의 전통을 기리며 각종 과일과 채소를 돌 위에 올리고 예를 치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에드가 칼렐의 설치미술품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도 재료 면에서 각별하다. 모두 소재를 이용해 자신과 선조의 시간을 은유한다. 광주비넨날레 이숙경 예술감독은 바나나, 파프리카 등 흥미로운 요소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전시기간 동안 며칠 단위로 교체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시대 속 개인… 희생된 광주인, 귀국한 고려인
▲팡록 술랍의 판화 ‘광주 꽃 피우다’.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광주인을 꽃(오른쪽)에 비유했다. (박꽃 기자 pgot@)
▲팡록 술랍의 판화 ‘광주 꽃 피우다’.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광주인을 꽃(오른쪽)에 비유했다. (박꽃 기자 pgot@)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초입 천장에 규모감 있게 걸린 팡록 술랍의 판화 ‘광주 꽃 피우다’는 한국식 목판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했다.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광주인은 꽃으로 표현했다. 시대의 격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의 삶에 관심을 둔 관람객이라면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의 후손들을 조명한 ‘삶의 극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문제의식을 지닌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가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에 터를 잡은 고려인 후손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제작한 설치영상물이다. 타이키 삭피싯의 ‘스피릿 레벨’은 메콩강 유역의 산업화가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았다. 이 예술감독은 “광주비엔날레를 위해 새롭게 만들었다”면서 “상당히 문제 제기적이면서도 너무 정치적이지는 않은 사색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치유와 명상 필요하다면 반야심경과 도자기 거울을
▲차이쟈웨이의 ‘나선형 향 만트라-반야심경’. 조형물에 가까이 다가서면 빼곡히 생긴 반야심경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박꽃 기자 pgot@)
▲차이쟈웨이의 ‘나선형 향 만트라-반야심경’. 조형물에 가까이 다가서면 빼곡히 생긴 반야심경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 (박꽃 기자 pgot@)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라면 차이쟈웨이의 ‘나선형 향 만트라-반야심경’에 마음을 빼앗길지 모른다. 멀리서 보면 마치 수행 중에 피우는 향을 확대한 듯한 고즈넉한 조형미에 매료되고, 가까이 다가서면 작업물 위로 빼곡히 새겨 놓은 반야심경에 몰입하게 된다. 장소를 옮겨 무각사로 가는 것도 방법이다. 류젠화 작가의 ‘숙고의 공간’에서는 적막한 암흑 사이 걸려 있는 흑색 도자기 거울을 만나게 되는데, 일그러진 듯 또렷한 형태로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다. 최장현 보조큐레이터는 “거울에 비친 자기 상이 수행, 참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부러 무각사를 찾았다면 한 층 아래 전시관의 대나무 숲 앞에 꼭 서 봐야 한다. 여느 비엔날레 작품보다 강렬한 쉼과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는 모습. 시각장애인 학생들과 함께한 작업물로 시력이 약한 사람 입장에서 경험하는 세계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박꽃 기자 pgot@)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는 모습. 시각장애인 학생들과 함께한 작업물로 시력이 약한 사람 입장에서 경험하는 세계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박꽃 기자 pgot@)

거대한 코끼리 조형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한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 관람객이 직접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끔 변주한 이건영 작가의 ‘바디스케이프 76-3’ 등 참여형 작품은 현대미술을 잘 알지 못해도 직접 만져보고, 움직여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친근한 예술품들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비롯해 국립광주박물관, 무각사,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예술공간 집 등에 작품을 고루 배치한 만큼 광주 전역이 품격 있는 전시장으로 변모하는 시간을 두루 경험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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