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 먹이가 풍부하거나, 아니면 천적이 없는 경우이다. 동물은 자신이 사는 공간에 먹이가 없을 것으로 확실히 예상되면 스스로 개체 수를 감소시킨다고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말한다. 한국의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도 “주변에 먹을 것이 없고 숨을 곳이 없는데 그 상황에서 새끼를 낳아 주체하지 못하는 동물은 진화과정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하였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고무받아 자신의 이론을 확신하였다는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개체 간 경쟁이 때로는 자신의 종을 멸종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맬서스, 다윈의 이론은 근대 자유주의 이론의 자양분이 되었고 개인 간 경쟁과 변화의 필요성을 하나의 도덕으로 자리 잡게 도와주었다. 개인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며 경쟁의 승리를 위해 스스로 능력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발전시키는 도덕적 행위가 되었다. 그러나 맬서스가 한 가지 보지 못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빛을 발휘하려면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존엄성이 없는 개인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의 자유주의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사는 것이라 말한다. 존 롤스도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위해 필요한 기초 재화(primary goods) 중 가장 으뜸이 존엄성이라 말하였으며 ‘자유론’의 존 로크는 여성의 존엄성을 인정한 남녀평등을 강조하였다. 또한 소유권 자유 지상주의자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도 소득 재분배의 문제점을 소유권자의 존엄성을 빼앗아 가는 행위로 바라보았을 정도이다.
맬서스가 살던 시대에서 사는 것이 단순히 먹고사는 것만이 문제였다면 근대국가를 넘어 자유주의 사상이 전 지구를 감싸고 있는 오늘날 개인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것은 식량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바로 존엄성에 기반한 삶의 질에 대한 요구가 저출산의 중요 요인이라는 의미다. 저출산 극복을 위한 육아, 출산 휴가, 보육 정책은 저출산이 아닌 시대에도 남녀 모두의 인적자원 활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엄밀히 말해 저출산만을 위한 대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결혼 지연 현상은 맬서스가 살던 시대처럼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이 아니라 개인, 특히 여성의 인적자원 활용 기회 가능성 확보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남성에게도 개인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결혼의 의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출산의 지연은 자녀의 존엄성과 삶의 질을 지켜주고픈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삶의 환경은 과연 청년층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있는가? 69시간 근로 시간 확대 찬성의 이면에 자리한, 기본급이 낮은 임금을 만회하기 위해 개인의 삶의 질과 존엄성을 포기해야 하는 참담함과 산업재해 사망자 수가 10만 명당 3.61명(2017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에 속하는 위험한 작업장 환경, 그리고 청년의 인적자본 투자수익을 중간에서 착취하는 ‘중간착취’ 문제 등의 해결은 청년층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다. 청년의 존엄성을 배려하는 정책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저출산 문제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