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전에 '비디오' 있었다... 2만5000개 비디오 전시로 흥행한 '원초적비디오본색'

▲3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전 '원초적비디오본색'에 전시된 수많은 비디오들. (박꽃 기자 pgot@)

유튜브 전에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흘려보내듯 소비해도 될 정도로 볼 만한 콘텐츠가 넘치는 지금과 달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영상은 직사각형의 VHS 비디오테이프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1980~1990년대 이야기다.

지난해 11월부터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선보이고 있는 ‘원초적비디오본색’이 바로 그 시절 비디오테이프를 다룬 기획전이다. 개인 수집가 조대영 씨가 소유한 실물 비디오테이프 2만 500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지금까지 3만 2000여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흥행에 힘입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월 19일 전시 종료 후 4월 중순부터 ‘원초적비디오본색 시즌 2’ 전시를 추가로 전개할 예정이다.

미디어아트처럼 쌓인 비디오테이프 더미 ‘장관’
청계천에서 공수해 온 실제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도

▲'원초적비디오본색' 포스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원초적비디오본색’은 유튜브 세대는 잘 알지 못하는 비디오테이프의 시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국내에 잘 알려진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 할리우드에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브래드 피트 주연의 '파이트 클럽', 이제는 고인이 된 강수연이 출연한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80~90년대 제작된 국내외 작품의 비디오테이프가 끝없이 모여 있다.

장만옥, 여명 주연의 ‘첨밀밀’, 진 켈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 등 해외 명작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극영화로 손꼽히는 '파업전야' 등을 직접 관람할 수 있도록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를 마련해둔 공간은 특히 인기 있는 장소다. 산처럼 쌓인 비디오테이프 더미가 그 자체로 정교한 미디어아트가 되어 관람객을 반기는 순간도 있다.

▲'원초적비디오본색'에 빼곡히 마련된 비디오테이프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시를 기획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김지하 학예연구관은 3일 “조대영 선생님의 비디오를 창고에서 꺼내 옮기고 작품을 목록화하는 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국공립기관의 프로그램은 잊혀져가는 것들 중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기획 취지를 전했다.

또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와 모니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전시 구성, 설치를 담당한 임훈 감독님이 청계천에서 공수해왔다"면서 “모니터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관람객의 요청이 들어와 ‘시즌2’ 전시때는 더 많이 구해올 예정”이라고 전했다.

신분증 확인해야 들어갈 수 있는 이색 레드존
‘모여야’ 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가 '영화운동' 수단 되기도

▲'원초적비디오본색' 한쪽에 마련된 성인 비디오테이프 전용 공간 레드존에 입장하는 관람객. 소위 '에로비디오'로 불렸던 비디오테이프가 잔뜩 모여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관람객의 액면가(?)와 상관없이 무조건 신분증을 검사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성인 비디오테이프 전용 레드존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이색적인 공간이다. 유명한 영화의 제목을 성인용으로 패러디한 창의적인 타이틀과 여성 배우들의 파격적인 모습이 담긴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봉만대 감독과 함께 ‘비디오 시대의 에로영화를 말하다’ 토크를 진행한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3일 “그 시절 비디오대여점 빨간딱지 코너에서는 밤마다 일군의 성인 남성들이 나타나 조용히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갔고, 대여점 주민은 그걸 까만 비닐 봉지에 넣어줬다”고 회고하면서 “1990년대 에로영화는 하위문화이면서도 영화계의 중요한 산업이기도 했다”고 그 의미를 짚었다.

▲'원초적비디오본색'에서 비디오 전용 플레이어를 이용 중인 관람자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비디오테이프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특정 공간에 모여들면서 '영화 관람을 통한 사회운동'도 함께 발달한 측면도 있다. 국가정보기관의 일반인 감시가 만연했던 시절 페미니즘이나 성 소수자 등 새로운 물결을 이야기하는 해외 영화가 비디오테이프로 공수됐다.

공개 상영이 불가능하다시피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현장을 녹화한 소위 ‘광주비디오’ 역시 암암리에 비디오테이프로 유통, 복제됐다. 2020년 개봉한 이조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광주비디오: 사라진 4시간’이 증언한 것처럼 비디오테이프 제작, 이동은 마치 한 편의 첩보작전을 방불케 했다. 전시 마지막 구간에는 이같은 흐름을 주목하는 '비디오 꼬뮌들의 연대기' 코너가 마련됐다.

▲조대영 씨가 '원초적비디오본색'에 전시되기 전 자신의 창고에 수집해두었던 수많은 비디오테이프를 바라보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최성욱)

이날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열린 토론회 ‘90년대 시네마테크와 우리의 극장’에 참석한 비디오 수집가 조대영 씨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비디오테이프에 얽힌 역사가 재조명되는 것이 기쁘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시를 찾고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이 헛된 일은 아니었구나 싶다”고 말했다.

조 씨는 "(시즌2 전시가 끝나는) 7월 이후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진 게 없다. 최악의 상황은 내가 또 지하실이나 빈 창고를 알아봐서 가지고 가는 것"이라면서 "대한민국 사회가 '상속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이 아카이브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