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프리즘] 경제안보 동맹과 한국 기업의 창업정신

입력 2022-12-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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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한진 창업주 조중훈 회장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언쟁을 벌이다 격분한 조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적도 있었다. 한진해운은 현대가 아닌 일본업체에 선박 건조를 맡기기도 했고 현대는 중동으로의 근로자 송출에 대한항공(KAL)을 쓰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열심히 일한 적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대사였다. 당시 유치위원장이던 정 회장은 회고록에서 한·불 경협위원장으로서 조 회장의 기여를 높이 샀다. 조 회장은 프랑스의 영향권에 있던 아프리카 나라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설득해 정주영 회장에게 몰아주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에서는 기업의 이익이나 사적인 감정이 우선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한국 재계의 오랜 미덕이다.

지난 5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을 찾았다. 2박3일의 일정 중 첫날 삼성전자를 찾아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고 마지막 날에는 현대차의 정의선 회장을 만났다. 삼성전자에서는 “생큐”를 연발했고 정의선 회장에게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이례적 덕담을 했다. 한국에 이어 일본 방문이 있었지만 바이든이 도요타를 찾아 갔다거나 기업인 누구와 만났다는 보도는 없었다. 바이든의 한국에서의 행보는 자못 이채로웠다. 한국 기업의 무엇이 세계의 최고 권력자 미국 대통령에게서 감사를 받고 경제안보 동맹의 최전선에 나서게끔 했을까? 높은 기술력, 뛰어난 마케팅 능력, 과감한 투자전략 등 한국 기업들의 강점을 우선 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국 기업들 특유의 공동체 정신과 연대의식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기업들이 커 나가게 된 것은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기업의 창업주들은 처음부터 나라와 기업을 하나로 해서 발전을 추구했다. 그래서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사업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을 경영목표의 최우선에 두었다. 현대중공업의 지붕과 담장에는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되는 것이며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길이다”라고 쓰여 있다. 선경(현 SK) 최종현 회장의 못다쓴 마지막 유고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되는 방법”이었다. SK가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회사가 되는 법이 아니었다. 포항제철을 짓던 박태준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라고도 했다. 한진의 조중훈 회장은 “한민족의 전진”을 꿈꾸며 회사명을 한진으로 했다. 이런 문화적 기반이 공유됐기에 한국 기업들은 나라를 위해서는 뭉쳤다. 이렇게 해서 이룬 것이 ‘한강의 기적’이 됐고 올림픽, 엑스포, 월드컵 등 세계적 이벤트를 유치해 국민적 자부심을 드높였다. 2030 엑스포 유치에 최태원 회장을 정점으로 한 재계가 한마음으로 뭉친 것도 이런 배경이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전 세계의 공급망이 와해됐다. 하나로 평평해진 세계에서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 큰 피해가 왔다. 거기에다 북한의 핵무기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한국 기업 발전의 본질적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이 위기가 한국 기업들을 경제안보 동맹의 최일선에 나서게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 기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 재계에 창업 이래 내려 온 기업문화이자 성장의 발판이었다. 이 기업들이 지난 정권의 4년간 43조 원이나 되는 해외투자를 했다. 노동시장의 자유도는162개국 중 145위로 떨어져 파키스탄(137위)만도 못하게 됐다. 어느 경제학자는 한국의 이런 경영환경을 매력도 없고 인센티브도 없는 불모지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들을 다시 국내로 데려오는 것은 정부와 사회의 몫이 됐다. 다행히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재계는 향후 5년간 국내에서 928조 원을 투자하고 38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으로 베트남으로 다 가버리면 국내에 뭐가 남느냐는 의구심을 단칼에 해소한 공동체 정신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힘을 합쳐 경제안보 동맹의 확실한 승자가 되자는 한국 재계의 다짐이기도 하다. 번영을 가져다 준 자유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업에서는 경쟁했으되 나라를 위해서는 발벗고 나섰던 정주영과 조중훈의 사례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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