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날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발사 현장을 시찰하러 나온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딸 김주애의 투샷을 게재한 것. 그동안 김 위원장과 부인 이설주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 자녀의 존재가 세상에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주요 외신들은 “후계자 후보”라고 추측하며 다양한 분석을 내놨다. 특히 김정은 체제 하에서는 여동생 김여정이 노동당 부부장으로, 최선희가 외무상에 기용되는 등 여성 인사 등용이 눈에 띄기 때문에 차녀 김주애가 후계자가 되더라도 큰 이변은 아니라는 평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2020년 4월 김정은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을 때 김여정이 후계자 후보로 거론됐던 만큼, 김주애가 성장하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은이 8살 때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3년생으로 알려진 딸 김주애가 과연 북한 김씨 왕조의 대를 이어갈지 주목된다.
18일 김 위원장과 동행한 여자아이는 흰색 패딩에 검은 바지를 입고 빨간색 구두를 신은 앳된 모습이었다. 그를 놓고 둘째 딸 김주애가 맞느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국정원은 사진에 찍힌 소녀가 김 위원장의 10세 정도 되는 둘째 자녀이며 이름은 주애라고 확인했다. 국회 정보위 간사인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은 국정원을 인용해, 김주애의 외모가 같은 또래 소녀들보다 체격이 크다고 전했다. 김주애는 어머니 리설주 여사 옆에 나란히 서서, 발사 트럭에 실린 거대한 미사일을 지나 김 위원장과 손을 잡고 ICBM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김주애는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또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중앙통신은 27일 ICBM 화성17형 개발과 발사 공로자들의 기념 촬영 소식을 전하며 김 위원장이 “존귀하신 자제분과 함께 촬영장에 나왔다”고 밝혔다. 정확한 날짜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대형행사 이튿날 이를 보도하는 북한 관영매체 관행상, 촬영은 전날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김주애는 첫 등장 때는 뱅헤어에 흰색 패딩을 입어 초등학생 같았지만, 이번에는 고급스러운 모피 장식이 달린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머리도 더 성숙하고 여성스럽게 매만져 엄마 리설주와 똑 닮았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발사 트럭 위 거대한 미사일 앞에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병풍처럼 서 있는 가운데, 김주애가 손뼉을 치거나 군인과 악수를 나누고, 김 위원장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지난 19일 첫 등장 보도(노동신문)에서는 “사랑하는 자제분”으로 표현했지만, 이날 보도(조선중앙통신)에서는 “존귀하신 자제분”으로 호칭을 바꿨다. 이에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주애가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커졌다.
안킷 판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 정책 프로그램 선임 연구원은 CBS뉴스에 “이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최근 ICBM 발사에 참여한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아버지와 나란히 서 있는 김주애의 사진은 이것이 그녀가 잠재적인 후계자로 자리잡는 시작이라는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분석했다.
CBS뉴스는 “김주애 공개는 미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북한의 미래 세대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김 위원장의 결의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한은 김주애 외에 다른 두 자녀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의 첫째 자녀가 아들이라고 봤을 때,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의 특성 상 어떻게 둘째가, 그것도 딸이 김정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김정은은 70년 이상 북한을 통치한 가문의 3세이며,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2011년 말 권력을 물려받기 전까지 연속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 랜드코퍼레이션의 수 킴 안보 분석가는 “김 위원장이 아들을 포함해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아들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후계 구도상 주애가 진정으로 김 위원장의 가장 ‘존귀한’ 아이인지 결론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정은이 자신의 딸을 공개한 것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며 “딸을 과시함으로써 김정은은 북한 인민들에게 핵무기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보증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27일 관영매체를 통해 발표한 논평에서 “화성17형을 세계 최강의 전략무기”라 칭하고 “조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략 무력을 보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레이프 에릭 이즐리 이화여대 교수는 CBS뉴스에 “김 위원장이 다른 북한 엘리트들에게 자신이 딸의 지도자 교육을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며 “이렇게 일찍 공개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례적이지만 김 위원장이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핵 미사일에 부여하는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반영한다”고 덧붙였다.
정성창 세종연구소 연구원은 “김정은은 아들이 리더십이 없다고 생각하면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수 없다”며 “차녀를 4대 지도자로 선택하는 데 대한 잠재적 반발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이 딸에게 원활하게 전달되도록 ICBM 발사 성공 행사에 딸을 데려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 이어 그는 “왕이 자녀를 많이 낳으면 가장 사랑하는 자녀를 후계자로 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김주애는 김정은의 공개 행사에 가끔 등장해 후계자 훈련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성인이 된 후에 세상에 존재를 드러냈지만, 사실은 8살 때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됐다고 한다.
다만, 일본 뉴스포스트세븐은 “만일 김정은이 예기치 못한 사태로 수 년 안에 사망한다면 동생인 김여정이 후계자가 되겠지만, 이설주와 사이가 좋아 김주애와도 좋은 협력 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정은은 2021년 12월에도 살이 쏙 빠진 모습이 포착돼 중병설이 재연됐다. 김여정이 어린 김정은의 자녀들을 제치고 김씨 왕조의 여제가 될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라는 의미다. 반면 김정은이 건강이상설을 불식하고 장기체제를 구축한다면 성인이 된 자녀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될 것인데, 미래에 김정은의 자녀와 김여정의 자녀가 사이 좋게 지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