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동안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다. 체코의 프라하, 포르투갈의 리스본 그리고 심지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라냐에서도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는 현지 사람들이 있었다. 하기야 요즘은 티브이를 봐도 그렇고 한국 사람인 나보다 더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이 드물지 않다. 그래도 알파벳도 생소하고 문장 구조도 달라, 배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말을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최상의 외국어 학습법에 대해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어휘가 중요하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단어들을 머리 속에 잘 저장해 두었다가 적재적소에 잘 쓸 수만 있다면 “외국어 어렵지 않아요”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다. 큰 어려움 없이 소소한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되려면 단어를 얼마나 알고 있어야 할까?
외국어 교육의 교과서로 불리는 ‘The room of language’를 저술한 프레데릭 보드머(Frederick Bodmer, 1894~1960)의 주장에 따르면, 최대 2000여 개 정도의 단어만 알고 있으면 가능하다. 매일 대여섯 개씩 어휘를 늘려간다고 할 때, 일 년이면 입이 트이고 기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만큼 간단치가 않다. 알고 있는 단어 수가 늘어도 어휘력이 덩달아 좋아지진 않는다. 열심히 기록하고 정리해 뇌 안에 잘 저장해 두었는데 막상 꺼내려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경우만 봐도 알고 있는 단어들은 제법 되지만, 정작 사용하는 건 소수다. 다른 나머지는 모두 그림의 떡이다. 머리 안에 고이 간직만 하고 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단어를 깊게 익혀야 한다. 다시 말해 철자 같은 외형만이 아니라 다양한 활용 예도 같이 머릿속에 넣어두어야 손에 쥐고 있는 연장처럼 바로바로 쓸 수 있다. 이는 1975년 실험심리학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103호에 실린 단어의 처리 및 보유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이 연구에서는 어휘 활용과 관련해, 사람들이 어휘의 소대문자 표기와 같은 피상적 외형에 주의를 기울일 때와 의미에 더 집중할 때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후자의 경우에 단어 기억 비율이 전자보다 5배 이상 높았다. 흥미로운 건 자신과 연관성이 있는 문장의 경우 어휘 기억과 활용에 더 효과적이라 한다.
어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머리에 담는 방법 못지않게 적당한 주기로 기억 상태를 새로 고침하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반복 주기다. 예를 들어 오늘 배운 단어를 연이어 내일 바로 테스트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조금 잊어버렸을 즈음에 시험을 치는 게 더 도움이 될까?
지난 2014년 독일 만하임 대학의 카롤리나 큐퍼-테첼 박사팀이 중학생들의 영어수업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 결과, 간격을 두는 게 어휘 습득에 더 효과적인 걸로 밝혀졌다. 일례로 배운 직후보다는 일주일 정도 뒤에 테스트하는 게 낫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시험이 한 달 뒤로 예정되어 있다면 11일에 한 번꼴로 단어 시험을 보는 게 좋다고 한다.
풍부한 어휘도 좋지만 발음이 정확하면 말이 좀 더 그럴싸하게 들린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특유의 액센트 때문에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라 본다. 사실 발음은 오래전 논란을 일으켰던 ‘오렌지’와 ‘어린쥐’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듣기와 연관이 있다. p와 f처럼 특정 알파벳의 구분이 어려운 건 우리말에선 이 둘 사이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도 어렵지만, 들어 구분하는 건 오랜 트레이닝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ㅔ’와 ‘ㅐ’ 그리고 ‘ㅒ’와 ‘ㅖ’ 사이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볼 때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종대왕께서도 참 흐뭇하실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