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우리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안줏거리가 된 주제는 ‘내 집 마련’이었다. 친구들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셋집에서 살고 있기에 정부의 8·16대책에 대한 관심이 쏠렸다. 다만 270만 가구나 되는 주택을 공급한다는 정부 발표에도 친구들은 “전세를 살아본 사람들이 대책을 만들어야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지,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오려면 아직도 멀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윤석열 정부의 주택공급 대책 발표 다음 날 시장 분위기도 친구들의 반응과 비슷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택공급 대책에 대한 청사진만 내놨을 뿐,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뒤로 미뤄 놓았다고 지적했다. 재건축 안전진단 규제 완화만 놓고 봐도 그렇다. 정부는 8·16대책에서 재건축 안전진단 규제 완화 방안을 연말까지 내놓겠다고 했다. 특히 어렵게 찾은 최근의 시장 안정 기조가 유지될 수 있도록 시장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해 적용 범위·시행 시기 등에 대한 최적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결국 언제 시행될지는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이야 집값이 하향 안정화되고 있어 이른 시일 내 안전진단 규제 완화가 조기에 시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자칫 시행 시기가 늦어지면 또다시 재건축 추진 단지들의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공급 물량 역시 마찬가지다. 안전진단 규제 완화 등을 통한 재개발·재건축 활성화를 통해 민간 공급 물량을 높일 계획인데, 이런 과정이 늦춰지면 270만 가구 공급 약속은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1기 신도시 재정비 역시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1기 신도시 재정비를 통해 수도권 공급 물량 확대를 약속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8·16대책에서 언급된 1기 신도시 재정비 내용은 올 하반기 연구용역을 거쳐 도시 재창조 수준의 재정비 마스터플랜을 2024년 수립하겠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내놓지 않은 정부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1기 신도시 주민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을 파기했다”며 항의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다.
논란이 확산하자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 파기는 거짓말”이라며 “1기 신도시에는 이미 30만 가구의 주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 이주대책 등 계획 수립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10만 가구 공급’이 아니라 ‘10만 가구 공급기반구축’이라고 공약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취임 100일을 맞아 진행된 기자들과 만남에서도 원 장관은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며 “5개 신도시(분당·산본·일산·중동·평촌)에 각각 1명씩 마스터플래너(신도시 개발과 관련한 전문가)를 두고 주민들과 소통을 지속해서 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번 논란도 약 100일간 주택공급 대책 발표 준비를 하면서 좀 더 국민의 시각에서 생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10만 가구 공급’과 ‘10만 가구 공급 기반 구축’을 놓고 해명에 급급할 게 아니라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플랜 일정을 앞당기고 주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발표를 앞세웠다면 주민 반발도 더 잠재울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원 장관이 그동안 보여온 ‘소통왕’의 이미지 때문에 더 아쉬웠을지도 모르겠다. 현장에 나가 전문가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고, 유튜브를 통해 MZ세대와도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선 원 장관의 노력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제 100일이 지났다. 앞으로 원 장관이 국토부 수장으로 민생 안정을 이끌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았다. 향후 행보에서는 국민의 시선에서 좀 더 생각하는 ‘소통왕’이 되길 바란다. ljy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