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배워갔다, 영화현장 성폭력 예방교육 500회 이상 치러낸 '든든'

입력 2022-07-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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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성평등센터 심재명 센터장이 지난달 4일 일본 공영방송 NHK와 인터뷰한 모습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한국영화성평등센터 심재명 센터장이 지난달 4일 일본 공영방송 NHK와 인터뷰한 모습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브로커’, ‘괴이’, ‘윤희에게’.

모두 영화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한 작품들이다. 특히 ’브로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에서 촬영하는 동안 해당 교육을 꼭 듣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해 한국어로 된 강의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 접했다고 한다.

영화계 성폭력 예방 교육을 전담하는 단체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다. 영화계 미투운동 이후 관련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2018년 개소했다. 전문 강사를 직접 양성하고 파견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63건의 예방 교육을 실시했고, 개소 이후 총 549차례 교육에 나섰다. 500편 넘는 한국 제작 영화와 OTT 시리즈물이 촬영 전 전문적인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다.

지난달 4일 일본 공영방송 NHK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든든 사무실을 찾아왔다. 한국의 사례를 모범적이라고 판단하고, 어떤 방식으로 영화 현장 성폭력 예방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과 취지를 청해 듣기 위해서다. 해당 방송은 6월 10일 일본 NHK 프로그램 '클로즈업 현대' 에서 송출됐다.

15일 든든 사무실에서 만난 공유진 예방교육위원은 “일본에는 이런 단체가 없는데 한국은 너무 잘 돼 있다면서 굉장히 감탄하더라”고 당시를 전했다. 현재 일본에서 든든을 모델로 한 사설 단체 ‘재페니즈 필름 프로젝트’가 발족을 앞두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한 '브로커'. 촬영 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CJ ENM)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성폭력 예방교육'을 이수한 '브로커'. 촬영 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CJ ENM)

인맥 중심 일자리 확보, 잦은 지방 촬영
영화계 특성상 성폭력 예방 교육 꼭 필요
스태프 중 ‘성폭력 문제 담당자 지정’ 권유

영화 촬영 현장은 일반적인 회사와는 여건이 크게 다르다. 작품마다 인맥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지는 관행이 굳어져 있어 업계 평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대규모 공간을 섭외해 촬영해야 하는 만큼 도심지보다는 지방에서의 촬영이 많아 단체 합숙이 잦고, 뒤풀이 형식의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한다.

몇 달간의 촬영이 끝난 뒤에는 전체 인력이 해산하는 방식이기에, 성희롱이나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어도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돌보는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없어 구조적 해결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공 위원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일반 회사에는 인사팀이 있어서 고충을 처리한다. 하지만 영화 현장에는 그럴 사람이 없다”고 문제를 짚었다.

그는 “현장에 나간 강사님이 스태프 중 성폭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담당자를 지정하라고 권유한다. 관련 감수성이 있으면서도 제작자와 상황을 조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작품 촬영 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영화 스태프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작품 촬영 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영화 스태프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든든은 통상적인 조직생활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이같은 영화계의 토양 안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위주로 교육한다.

“먼저 성희롱, 성폭력의 개념을 정의해요. 이후 촬영 현장에서 피해가 일어났을 때 관리자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동료로서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 피해자로서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해외 우수 사례도 공유하고요. 무엇보다 이 문제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권력의 문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든든이 2020년 5월부터 9월까지 834명의 현장 경험 영화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계 성희롱,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장 가해자의 81.7%는 남성이었다. 이때 피해자는 압도적으로 여성이다.

반면,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는 좀 다르다. 가해자는 여성(30.4%)보다 남성(58.0%)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는 성희롱, 성폭력이 성별 문제뿐만 아니라 직급 간 위계관계, 세대 간 인식 차이에 따라서도 불거질 수 있는 문제임을 추정하게 한다.

“동성 간에도 충분히 성희롱이 발생할 수 있다고 교육해요. 장난으로 (민감 부위를) 만진다든지, ‘오늘 피곤해 보이네(어제 밤에 뭐 했을까)’ 같은 식의 사생활 침해적 질문이 대표적입니다.”

▲작품 촬영 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영화 스태프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작품 촬영 전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고 있는 영화 스태프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피해자 지원하고 직접 가해자와 합의 대리 나서기도
“문제 생겼을 때 연락할 곳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

영화 현장의 성폭력 예방 교육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조 7(성폭력 예방교육 등 방지조치)에 따른 의무사항이다.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됐다.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강제성은 아직 없지만, 법이 예방 교육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현장 제작자들에게는 의무를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공 위원은 설명했다.

공 위원은 “교육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영화계 구조를 이해하고 있는 강사들이 맞춤 강의를 해줘서 좋다는 의견이 가장 많고, 다 아는 얘기여도 한 번 더 상기해주면 서로 조심하는 계기가 된다고 한다”며 긍정적인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든든은 온라인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 신청을 받는다. 10명 이상 스태프가 모여 있는 현장일 경우 오프라인 강의를 위해 강사를 배정한다. 전문교육을 이수 받은 강사가 현장에서 1~2시간 동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성희롱, 성폭력 예방 교육을 진행한다.

이때 강사비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지급한다. 영화 촬영 현장에 필수적인 교육과정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는 기관의 제작지원 등을 받는 작품의 경우 해당 교육을 의무 이수해야 하는 조건을 걸어 강제성을 확보하고 있다.

든든이 관리, 파견하는 강사진은 현재 14명이다. 영화 프로듀서,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 업계 각계의 현장을 경험한 이들로 구성돼 있다. 2주 동안 전문 교육을 이수 받아 강의를 시연한 뒤 든든의 최종 승인을 얻어 현장으로 향한다.

공 위원은 지난 3월 강사 모집 당시 현재 인원의 두 배 넘는 지원자가 모였다며 “확실히 관심이 많아진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성폭력 예방교육이 든든 활동의 핵심 축이라면, 피해자 지원은 또 다른 축이다.

피해 사실이 접수되면 피해자에게는 의료, 법률, 심리지원에 나선다.

이후 문제가 일어난 영화 현장의 제작사에 든든 이름으로 관련 내용을 명시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라는 공문을 보낸다.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에게 구두, 서면 사과를 받거나 재발방지각서를 작성하게 하는 등 합의 대리에 나서기도 한다.

공 위원은 "예방 교육 후기를 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연락할 곳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괜히 말하지 못하고 참기는 고통을 겪기보다는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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