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자급률이 낮다는 건 물가 관리가 어렵다는 의미다. 곡물 자급률이 20% 수준인 한국은 비상이 걸렸다. 국내 곡물 수요의 상당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수입 가격이 오르면 이를 원재료로 한 가공식품 가격도 오른다. 이는 음식점 등 서비스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활용 가능한 물가 관리 수단은 수입 확대뿐인데, 이마저 수입선이 협소해 효과가 제한적이다.
1일 통계청에 따르면, 3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보다 4.1% 급등했다. 물가 급등은 주로 석유류·서비스 상승에 기인했지만, 최근에는 가공식품 가격 변동도 심상치 않다. 주로 밀, 콩, 옥수수가 원재료인 상품이 급등세다. 3월 기준으로 밀가루는 14.3%, 국수는 32.2% 올랐다. 상승 폭은 매달 확대되고 있다. 식용유는 1월까지 상승률이 10%대에 머물렀지만, 2월부터 20%대로 확대됐다. 간장(18.6%), 된장(16.0%) 등도 상대적으로 상승률이 크다.
주된 배경은 원재료 가격 상승이다. 밀, 콩, 옥수수 등은 국내 생산량이 적어 수요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들 국가의 수출량이 줄었고, 국내 공급량에도 약영항을 미치고 있다. 이는 밀, 콩, 옥수수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쌀을 제외하면 국내 수요를 국내 생산만으로 조달 가능한 곡물은 사실상 없다.
물가 측면에서 곡물은 일반적인 농·축산물과 성격이 다르다. 농산물 중 채소류와 축산물은 가뭄·수혜나 병충해 등으로 가격이 급등해도 공급 충격이 해소되면 단기적으로 제자리로 돌아간다. 본래 계절성과 변동성이 큰 데다 보관·유통기간이 짧아서다. 품목 자체가 최종재인 경우가 많아 다른 품목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이다. 상추와 무, 양파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곡물류 물가는 기조성이 강하다. 공급량이 재배면적·기술 변동에 민감하고, 보관·유통기간이 길다. 물가가 급등하면 그 충격이 장기간 이어진다. 특히 곡물은 상당수 품목이 중간재로 가공을 위한 원재료의 성격을 띤다. 곡물값 인상은 가공식품, 사료 등 중간재는 물론, 중간재를 재료로 한 서비스, 축산물 등 최종재, 다른 원재료·중간재의 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수입 의존도다. 2019년 기준 주요 곡물의 자급률은 밀 0.5%, 옥수수 0.7%, 콩 6.6%에 불과하다. 이마저 수입선이 일부 국가에 쏠려 있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수입액 상위 4개국의 점유율은 각각 83.3%, 83.7%, 98.5%에 달한다. 특정 국가의 재배량, 해당국과 통상환경에 따라 국내 전체 수입량, 물가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는 단기적으로 주요 곡물의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대로 열린 물가관계장관회의에서 사료용 옥수수와 식용옥수수에 대해 대체입찰을 실시하기로 했다. 계약물량을 포함한 확보물량은 사료용 밀이 내년 1월분까지, 옥수수와 식용옥수수는 각각 올해 9월분까지, 8월분까지다. 그나마 식용옥수수는 루마니아산 추가 계약(3만5000톤)이 확정했다.
사료용 밀과 옥수수를 대체할 수 있는 겉보리, 소맥피에 대해선 할당관세 물량을 각각 6배, 2배 늘린다. 중장기적으론 민간의 해외 곡물 공급망 확대를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비축시설을 확대하는 방향의 국제 곡물 수급 안정화 방안을 올해 중 마련할 계획이다. 이 밖에 가공식품 주원료인 대두, 조제땅콩, 칩용감자, 옥수수, 설탕 등에 할당관세를 한시 적용하거나 연장한다.
근본적으로 곡물발 인플레이션을 막으려면 곡물 자급기반 확충과 수입선 다변화를 통한 비축량 확대가 필수적이다. ‘식량 안보’ 확보다. 식량 안보와 관련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총 4조9811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농업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사업에 가장 많은 2조297억 원을 투입하고, 정부양곡 매입비로는 1조4289억 원을 지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