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민주주의 최대 적은 ‘외로움’, 트럼프 현상·유럽 극우 부상 배후

입력 2022-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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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피닉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지난해 7월 피닉스에서 열린 행사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솔직히 선거에서 우리가 이겼어”

지난해 7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인 마이클 벤더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집필한 서적의 제목이다.

2020년 11월 4일 선거가 끝난 직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지자들을 향해 “솔직히 우리는 이 선거에서 이기고 있고, 이미 이겼다”며 근거 없는, 의미 없는 선언을 했다. 벤더의 저서는 당시 선거전에 있던, 그리고 지금도 남아있는 트럼프 열성 지지자들의 갈망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최근 트럼프가 아직도 미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유럽에서 극우세력이 부상하는 배후로 ‘외로움’에 주목했다.

전문가들은 2016년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사업가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제치고 백악관에 입성하게 한 원동력이자, 트럼프가 2020년 재선 도전에 실패해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중장년층을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열성 지지자 단체인 ‘프론트 로 조스(front row joes)’가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같은 차를 타고, 호텔 방을 같이 쓰면서 서로를 의지하며 미국 전역에서 선거집회를 열고 트럼프를 위해 목소리를 낸다.

이 단체의 회원 대부분이 중장년 백인이다. 이에 대해 벤더 기자는 퇴직이나 배우자와의 사별 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트럼프 지지활동을 통해 이들은 타인과의 유대감을 느낀다.

▲올해 1월 미국 애리조나주 플로런스에서 열린 집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가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올해 1월 미국 애리조나주 플로런스에서 열린 집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가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닛케이는 소득 격차에 분노하는 빈곤층, 소수 엘리트 계층이 누리는 특권에 분개하는 블루칼라 노동자에 이어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이 미국 정치의 변수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차기 대선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판에 복귀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프랑스에서는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을 간신히 꺾고 가까스로 재선할 수 있었던 분위기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친한 친구가 전혀 없다” 사회관계자본 급감한 미국 사회

로버트 푸트남 미국 하버드대학교수는 2000년 저서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종교·자선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는 커뮤니티의 쇠퇴가 1960~1970년대 시작되면서 이른바 ‘사회관계자본’이 감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관계자본은 개인 간의 유대 강도, 상호신뢰 등의 강도를 말한다.

사회관계자본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동시에 가파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미국 보수 싱크탱크 아메리칸엔터프라이즈연구소(AEI)와 갤럽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친한 친구가 전혀 없다’에 답한 성인 비율이 1990년 3%에서 2021년 12%로 늘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고립감은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이 변하고, 소득수준 개선, 저출산 고령화 문제 등 시대의 흐름이 개인주의 성향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고립은 소외감을 만들게 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85세 남성이 지난해 11월 코로나19 부스터샷을 접종 받고 있다. 프랑크푸르트/AP뉴시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85세 남성이 지난해 11월 코로나19 부스터샷을 접종 받고 있다. 프랑크푸르트/AP뉴시스

이런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의도치 않게 고립감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고독감을 자주 느낀다고 답한 성인 비율은 2018년 9%에서 2020년 23%로 급증했다. 외로움을 가끔 느낀다고 답한 성인까지 포함하면 이 비율은 2018년 23%에서 2020년 50%로 늘었다.

고독은 불안과 공포를 만든다

▲지난해 1월 6일(현지시간) 오리건주 세일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연대 항의를 위해 모여있다. 세일럼/AP뉴시스
▲지난해 1월 6일(현지시간) 오리건주 세일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연대 항의를 위해 모여있다. 세일럼/AP뉴시스

문제는 고립된 사람일수록 극단적인 주장에 휩쓸리기 쉽다는 점이다. AEI가 지난 2020년 대선 직전 가족과 지인과 교류가 없는 성인을 대상으로 정치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들 사이에서 트럼프 지지율은 45%였다. 반면 조 바이든의 지지율은 39%에 그쳤다.

고독은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독일 히틀러 체제의 등장은 사회의 원자화, 사회 해체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즉 전체주의 세력은 대중의 불안에 편승하여 사회적 유대를 먼저 파괴한 다음 손쉬운 방법으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는 뜻이다.

트럼프 현상이 전체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고독한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자극해 이를 통해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프랑스 남서부 생피쉬르니벨에서 24일(현지시간) 한 고령의 남성이 대선 투표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프랑스 남서부 생피쉬르니벨에서 24일(현지시간) 한 고령의 남성이 대선 투표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사회적 고립감을 느끼는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의 지난해 주요 28개국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독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율은 33%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0년 보고서에서는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사람의 비율은 주요 37개국 평균 10%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각국이 사적 모임을 제한한 것도 이러한 고립감 심화를 촉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지원이 필요하다 취업 기회와 연금·의료 제도 정비 등 경제적인 측면은 물론 커뮤니티 활성화를 통한 유대감 형성 지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돼야 한다.

닛케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이 권의주의 국가에 맞서 결속을 보이지만, 각국의 정치기반인 중장년층의 사회적 고립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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