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중국 때리기’에선 우선순위 밀려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미국 반도체에 비해 중국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재편하고 있어 미국 반도체 산업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7년 당시 반도체는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때리기’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트럼프는 당장 경제적 효과를 볼 수 있는 무역관세 부과를 통해 중국이 불공정무역을 통해 벌어드린 돈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우선이었다.
2019년 5G 통신장비와 스마트폰 반도체를 만드는 화웨이 제재를 시작으로 세계 5위의 파운드리 기업인 SMIC, 낸드플래시 기업인 YMTC(양쯔메모리), D램 기업인 CXMT(창신 메모리) 등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제제가 본격화했다. 2021년 2월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안보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의 대중 압박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1980~90년대 지금의 생태계 만든 미국
바이든의 이러한 결정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동했다. 첫째,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 굴기에 대한 우려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미국 내 보고서가 줄줄이 나오며 조급해진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2021년 4월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이 발표한 보고서이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반도체 생산은 연평균 4% 증가했는데,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미국의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2020년 12%에서 2030년 10%로 하락하고, 중국은 15%에서 24%로 확대되어 중국이 반도체 최대 생산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러한 객관적인 평가는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반도체 압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둘째 차량용 반도체 공급 대란이 본격화하면서 미국 내 제너럴모터스(GM) 등 북미 지역의 많은 자동차 생산라인이 멈추게 되었고, 그에 따른 실업률 상승 등 미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2021년 4월 “반도체는 미국이 세계를 이끌었고, 20세기 중반에도 그랬고, 21세기에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미국 반도체 산업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사실 반도체 설계는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고, 제조 및 패키징 등 후공정은 한국, 대만, 중국 등 아시아가 주도하는 지금의 반도체 생태계는 1980~90년대 바로 미국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설계만 하고 제조는 TSMC 등과 같은 파운드리 기업에 위탁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중국 반도체산업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뒤늦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 부흥이 시작되었고, 결국 반도체는 미·중 간 기술패권의 새로운 게임체인저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메이드 인 USA’를 만들어라”
바이든 대통령의 속내는 단순히 중국의 반도체 굴기 견제를 넘어 잃어버린 반도체 제조 공급망을 새롭게 구축해 모든 반도체를 ‘메이드 인 USA’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타이완이 아닌 완전히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전 세계 반도체 수요의 34%를 차지하고도 반도체 제조업 생태계 비중은 12% 정도에 불과한데, 향후 10년 안에 이를 24%까지 확대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중국, 한국과 대만을 추월해 설계뿐만 아니라 제조까지 1등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체적인 역량이 부족하니 한국과 대만 등의 도움을 받아 일어서고 중국 반도체 제조기업의 성장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리스크가 언제든지 다시 부각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미국 경제 압박과 향후 안보전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산업에 500억 달러를 지원하고, 2022년에는 국방비와 국가과학재단이 12조 원을 출자해 국가반도체기술센터를 설립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美 對中 압박으로 외부 수혈 차단돼
“10년 동안 단 하나의 칼을 갈 듯, 100일에 1나노씩 줄이자.” 베이징의 반도체 장비 전문기업인 화줘징커를 방문하면 쉽게 눈에 들어오는 플래카드 문구이다. 화줘징커는 칭화대학 IC 제조장비 연구실 박사 출신 엔지니어 8명이 모여 칭화대학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12년 설립한 중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연구개발(R&D) 기업이다.
미국의 대중 압박으로 인해 중국 반도체 산업은 외부로부터 수혈받았던 팔다리가 모두 다 잘려 나간 상태이다. 결국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술자립이고 이를 단시일 내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국은 결코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국 기업과 막대한 시장을 기반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설계~소부장’ 반도체 자립 대장정
국내외 매체에서 보도하듯이 중국 반도체 산업이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이해하면 안 된다. 그 배경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중국은 전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시장으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반도체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반도체가 사용되는 모든 전자제품의 25%가 중국에서 소비되고 있고, 특히 전 세계 웨이퍼 출하량의 약 25%가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둘째, 중국 팹리스 기업의 빠른 성장세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설계 분야인 팹리스 비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팹리스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16%로, 현재 미국과 대만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매출 상위 10대 반도체 기업 중 팹리스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셋째, 반도체 산업 중 중국이 가장 강점을 보이고 있는 반도체 후공정(OSAT) 영역의 성장이다. 중국의 주요 OSAT 기업은 글로벌 시장의 약 40% 점유하고 있다. 산업 생태계별로 기술 병목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시일 내 자립은 힘들겠지만 긴 호흡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도체 설계-제조-후공정-장비-소재·부품 등 5가지 영역에서 이미 반도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반도체 자립을 위한 펀드 규모도 지난 1·2기 국가반도체펀드보다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0월 결성된 2042억 위안의 2기 펀드는 미국의 제재 분야인 노광기 등과 장비·소재·부품에 집적화될 것이다. 2021년 6월 미국 상원에서 통과된 ‘미국 혁신경쟁법’에서 5년간 반도체 생산과 연구에 투자될 520억 달러는 중국의 1기와 2기 펀드를 합친 금액과 거의 비슷하다. 또한 중앙정부에 발맞추어 지방정부도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기술자립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지방정부의 반도체산업펀드 규모만 총 3508억 위안으로 중앙정부의 1·2기 펀드를 합한 금액과 비슷하다.
미·중 사이 냉정한 전략적 판단 필요
“반도체는 사람의 심장과 같다. 심장이 약하면 덩치가 아무리 커도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다.” 2018년 4월 시진핑 주석이 강조한 이른바 ‘반도체 심장론’이다. 시 주석은 반도체 자립의 대장정과 14억 인민의 총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반도체 역량이 미국 반도체 산업 부흥에 이용만 되고 과거 일본 사례처럼 추락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꿈꾸는 메이드 인 USA를 만들기 위해서는 1조 달러(약 1200조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러한 미국우대정책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또한 향후 새로운 미국 대통령에 따라 지금의 반도체 기조가 또 어떻게 변화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냉정히 전략적으로 살펴봐야 할 문제이다.
박승찬
중국 칭화대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대한민국 주중국대사관 경제통상관 및 중소벤처기업지원센터 소장을 5년간 역임했다. 또한 미국 듀크대학에서 교환교수로 미중관계를 연구했다. 현재 사단법인 중국경영연구소 소장과 용인대학교 중국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