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가 빠르게 보급되는 상황이라 피스톤 등 내연기관 부품에만 의존하는 부품사는 앞날이 캄캄한 상황입니다. 영업이익률이 3%도 안 되는 상황에서 대출금마저 회수되면 부도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 중견 자동차 부품사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들어 내연기관 부품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에 대해 금융권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어 재정 상황이 열악한 부품업계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우려다.
위기의식은 부품업계 전반에 번져있다. 완성차 업계의 생산 회복이 지연되며 부품사의 어려움도 함께 커지고 있어서다. 적자로 돌아선 부품사가 94% 늘어난 것으로 조사됨에 따라 자동차 업계는 정부에 대책 마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자동차산업연합회(KAIA)는 최근 세 차례에 걸쳐 부품업계 간담회를 열고 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건의서를 마련해 3일 정부에 제출했다. KAIA는 자동차산업협회, 자동차산업협동조합, 자동차부품산업진흥재단, 현대차ㆍ기아, 한국지엠, 쌍용협의회 등 9개 단체로 구성된 협의체다. 지금까지 KAIA는 한국지엠 협력사, 반월ㆍ시화공단 부품사, 현대차ㆍ기아 협력사 등과 연쇄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에서 부품업계는 “2021년에는 완성차 생산 회복을 기대했지만, 코로나19에 이은 반도체 부족 심화에 따라 회복이 지연되며 부품업체의 어려움도 심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자동차산업협회(KAMA)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등록된 상장사 82개 부품사의 연결재무제표를 분석한 결과 적자기업 수는 지난해 1분기 18개사에서 3분기에 35개사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3분기 만에 적자 상태 기업이 94% 늘어난 것이다.
부품사 중에서도 중견,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특히 심했다. 대기업(만도, 케이씨씨글라스, 현대위아)의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38.2% 늘어난 반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은 영업익이 각각 52.3%, 98.8%씩 대폭 감소했다.
부품업계 관계자는 “대형 부품사는 회사채를 발행해 자체 자금을 조달할 수 있지만, 영세한 2~3차 협력업체는 금융권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어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간담회에서 부품업계는 코로나19로 외국인 근로자 채용이 어려워지며 현장에선 극도의 인력난이 벌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에 업계는 외국인 근로자의 취업활동 기간 1년 한시 연장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숙련 외국인 근로자 장기체류 허용 비자의 업체당 허가 인원을 늘려줄 것을 촉구했다.
주 52시간제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근로자들이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들자 일자리를 많게는 세 개씩 소화하며 현장의 안전사고 위험이 늘어났다는 이유에서다. 업계는 기업이 생산성 둔화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위험 등 이중고를 겪고 있는 만큼, 업종과 기업 규모별로 주 52시간제를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금융권의 유동성 지원도 촉구했다. 기업 평가 과정에 코로나19의 특수성을 반영할 필요가 있고, 정부가 미래차 선도기업 운영자금 등을 추가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투자와 물류 지원도 요구했다. 중소 부품업체는 미래차 기술에 맞는 투자가 어렵기 때문에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또, 수입 부품의 지체 없는 하역을 위해 우선 접안과 양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도 덧붙였다.
중견 부품사 관계자는 “물량이 많고 자금력이 있는 대기업은 자체적인 물류망을 활용할 수 있지만, 부품사는 꿈도 못 꾸는 일”이라며 “자체적으로 선복(배의 짐을 싣는 공간)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 최근의 글로벌 물류난에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했다.
정만기 KAIA 회장은 “미래차 전환이라는 부담과 반도체 확보 어려움, 주 52시간제 적용,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외국인 근로자 확보 어려움에 더해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의 장기화 우려가 더해지면서 자동차 부품업체는 해외투자를 심각히 고려하는 등 국내에서는 생존 자체를 우려하는 상황”이라며 “정부는 이런 상황을 고려해 임기 말이지만 현장 목소리에 보다 귀를 기울여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에 조속히 나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