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이 경제성장 초기에는 기세등등, 빠르게 성장하다 점차 성장동력이 사라지면서 선진국과의 거리가 다시 멀어지는 현상을 ‘중진국함정(middle income trap)’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개도국은 사람은 많고, 자본과 기술은 부족하다. 이 상태에서 자본이 늘어나면 1인당 소득은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그런데 무조건 돈만 집어넣는다고 1인당 생산량이 계속 늘지는 않는 법이다. 위기의 시작이다. 이때부터는 자본이 아니라 기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2차 대전 이후 신흥국이 중진국함정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예는 한국과 대만이 유이하다. 한국과 대만 모두 일부 첨단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때 차세대 선진국으로 대우받던 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도 모두 이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중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남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남미를 반면교사 삼아 다가올 중진국함정을 벗어나려는 준비였다. 그런데 최근 중국 정부의 행동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남미 경제의 문제점을 무질서에서 찾은 것 같다. 무질서는 안정의 반의어이다.
중국이 능히 중진국함정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탄탄한 과거의 실적을 바탕으로 한다. 개혁개방 이후 30년간 연평균 10% 성장, 이것을 기적(miracle)이라고 칭한다면 중국의 앞날은 거칠 것이 없다. 베이징대 린이푸 교수는 그의 책 ‘중국의 기적’에서 ‘이렇게 크고 못 살던 나라가 성장한 예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하였다. 중국이 ‘유니크’한 나라이고, 그 길이 글로벌 표준이 된다면 중국 경제의 앞날은 창창하다.
중국이 중진국함정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 역시 기술혁신을 근거로 제시한다. UC 샌디에이고의 베리 노턴 교수는 중국의 경제성장 경험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 축적에 불과하다며, 높은 성장률은 그전의 경제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렇다고 평가하였다(‘중국경제-시장경제의 적응과 성장’). 지금까지 중국의 혁신은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빈곤 퇴치 과정에서 일부 나타났을 뿐 선진국 기술을 따라잡을 강력한 혁신은 별로 없었다는 주장이다.
기술혁신은 현실경제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개도국은 선진국 기술을 도입하기도 하고, 유사한 기술을 자체 개발하면서 제품에 적용한다. 여기에서 성공한 제품은 세계시장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게 된다. 경제학에서 기술혁신은 좀 더 엄밀한 기준을 요구한다. 남들보다 앞선 기술, 좀 더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 그래서 노동자에게 더 높은 임금을 줄 수 있는 기술의 개발이다. 이런 기술 진보가 있어야 남들만큼 일하고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들 수 있고 중진국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국이 중진국함정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또 다른 견해는 MIT 대런 애스모글루 교수의 책(‘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국가가 민간기업의 기술혁신을 정치·경제 제도적으로 충분히 보장한다면 그 경제에서는 혁신이 빠르게 일어날 것이고, 잘사는 나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정치제도가 기본적으로 민간의 창의성과 혁신성을 억압하고 있어 중진국함정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평가했다.
중국 경제의 기존 성장방식은 향후 얼마간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중국은 아주 큰 나라이고, 아직도 중서부 내륙은 절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내륙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위한 자본 투입은 상당 기간 경제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방식은 불평등 해소, 균형 성장이라는 절대적 당위성을 가진 정치 목표와 잘 어울린다. 큰 나라는 국내 경제 순환만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고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확신한다. 당분간 전기차 판매량은 매년 갱신될 것이고, 내수 소비재와 서비스 산업도 분명 호황이 기대된다. 성장의 엔드게임을 즐길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질적 변화 없이 양적 투입에 의존하는 성장이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이론적·역사적 경험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술개발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착취적인 정치제도가 민간기업의 혁신을 방해하면 중국의 성장동력은 분명히 떨어질 것이다. 슘페터는 혁신은 창조적 파괴라고 하였다. 시진핑정부는 미국과의 경쟁 속에서 기술독립과 혁신을 외친다. 동시에 안정(또는 화평, 화해)을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삼았다. 창조적 ‘파괴’와 안정이 공존할 수 있을까. 승부는 이미 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