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종잡을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바이러스의 확산세에 코로나19를 둘러싼 비관론과 낙관론을 오가는 사이, 새해를 맞았다. 코로나는 과연 종식될 수 있을까. 역병이 창궐한 지 만 2년을 맞기까지 우리 사회는 ‘바이러스 종식’에 대한 의문을 넘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끊임없이 맞닥뜨리고 있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돌아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코로나 사태가 지나치게 길게 이어진 탓이다. 이는 문화인류학자 칼레르보 오베르그가 제시한 ‘문화충격’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력한 문화충격을 경험한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6개월이 지날 즈음부터 적응하기 시작해 1~2년 시간이 흐르면 완전히 적응한다는 이론이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에 적응하기에 코로나 2년은 충분히 긴 시간인 셈이다.
김 교수는 “기다리지 말고 변화해야 한다.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다시 (코로나 발발 이전인) 2019년처럼 살 수 있어’, ‘어떻게든 버텨보자’라는 태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라면서 “막연한 희망을 갖기보다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어떻게 변화해나갈지를 고민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난 2년에 걸쳐 트렌드 변화의 속도를 가속화한 것은 물론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불러왔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소비자 트렌드 분석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김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2'의 타이틀 키워드 ‘TIGER OR CAT’에서 유추할 수 있듯 “기다리지 말고 변화하라”고 주문한다. 변화에 잘 적응하는 호랑이(Tiger)가 될 것인가, 도태돼 고양이(Cat)로 전락할 것인가. 변화를 넘어 혁신이 절실한 또 한 해의 시작점에서 이투데이가 김난도 교수를 만나 코로나 이후의 사회상, 소비 트렌드 변화에서부터 대선 정국까지 함께 해답을 찾아봤다.
'트렌드코리아 2022'의 10개 주요 키워드 가운데 김 교수는 가장 핵심 키워드로 ‘나노 사회’를 꼽았다.
한국 사회가 원자 단위로 파편화돼가고 있다는 뜻의 ‘나노 사회’는 전혀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김 교수는 “나노 사회는 100년 이상 오래 계속돼온 흐름이자 하나의 메가 트렌드”라면서 “산업화 이후 줄곧 이어져온 나노사회 트렌드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름을 부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따라 대화가 사실상 금지됐다. 인간은 대화하고 소통하는 존재인데 그걸 하지 말라는 것도 모자라 마스크로 얼굴 표정까지 덮어야 하니 미묘한 감정 표현조차 읽을 수 없게 됐다. 가뜩이나 단절되고 있는 사회가 코로나로 폭발적으로 단절돼버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팬데믹으로 인한 우울도 깊어졌다. 흔히 ‘코로나 블루’라고 표현되는 이 우울감에 대해 김 교수는 '나노사회 블루'가 더 적확한 표현이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종식되면 ‘블루’한 사회가 없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질병에 대한 공포 자체보다 파편화된 개인의 고립감에서 오는 블루가 더 큰 만큼 ‘나노 블루’는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계속 남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연대와 결속력을 잃어가는 ‘나노사회 블루’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주변 시력’에 근거해 공동체 의식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변 시력이란 와튼 스쿨의 조지 데이, 폴 슈메이커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주변에서 나오는 약한 신호와 디테일을 포착해 해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요새는 음악도 특정한 곡 하나를 들으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그와 비슷한 곡을 큐레이션해준다. 다량 정보사회인데 개인의 지평은 자꾸 줄어들고 주변 시력은 약해진다”고 지적한 그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니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해지는 것”이라며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서로 교감하는 능력을 복원해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노사회가 가속화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통용되던 혈연, 지연, 학연 등의 힘이 약해지는 반면 나노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스스로가 지향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등으로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것. 그는 “취미, 취향 공동체를 넘어서 ‘정체성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다. 자신과 정체성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새로운 기준의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자신이 소속된 준거집단 위주로 형성되던 전통적인 ‘우리’라는 의식이 정체성 위주로 재편되면서 직장도 모임도 심지어 가족도 결속력을 잃어간다. 김 교수는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이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 끝에 도달한 결론을 ‘머니 러시’ 키워드로 꼽았다. 그는 “특히 MZ세대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뭘 잘할 수 있는가’ 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돈과 연결시키는 방향을 고민하고 ‘N잡러’를 불사하며 수입 파이프라인을 다각화한다”고 봤다.
재테크 붐은 IMF 외환위기, 유럽발 재정위기 등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 현상이지만, 유독 코로나 이후 ‘영끌’, ‘빚투’ 등의 유행과 함께 주식을 넘어 코인투자 붐까지 머니러시 열풍이 거세다. 과거와 지금의 차이점은 뭘까. 김 교수는 “투자 연령이 크게 낮아지고 이전보다 투자가 훨씬 과감해진 점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는 성장이 정체된 경제적 환경과 무관치 않다. 그는 “지금 젊은 세대들은 ‘고진감래’를 믿지 않는다. 공부든 저축이든 건강관리든 ‘지금 힘들지만 이 힘든 것을 잘 참고 견디면 너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라는 말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라며 “이런 현실에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과감한 투자가 아니고서야 투자를 아무리 잘해도 ‘벼락 거지’ 신세인 것이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 저성장 기조의 경제적 환경으로 그럴 수밖에 없게끔 내몰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일상 생활에서는 미래 지향적 사고가 아닌 현재 지향적 사고로 바뀐 MZ세대가 당장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욜로, 소확행, 미세행복에 이어 ‘바른생활 루틴이’ 같은 작은 성공을 중시한다.
최근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소비권력층은 MZ세대다. 그러나 김 교수는 “소비의 양적 규모나 질적 파급력으로 볼 때 대한민국 소비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세대는 X세대”라며 이들을 ‘엑스틴’으로 명명해 소환한다. 1965~1979년생인 X세대 중 ‘엑스틴’은 1970년대생으로 경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10대(teen) 시절을 보내 자유롭고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고, 10대 자녀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세대로 김 교수는 정의했다.
그는 “시장이 ‘구매력은 X세대가 높지만 바이럴 파워는 MZ세대가 강하다’라는 착각에 빠져있지만 그렇지 않다”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다 경험해본 엑스틴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급성장한 이커머스 시장도 견인했다. 2020 인터넷 이용 실태조사(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40대 온라인 쇼핑 이용률은 2019년 71.6%에서 지난해 86.3%로 약 15%P 늘었다.
그래서일까. 김 교수는 메타버스의 티핑포인트도 엑스틴을 꼽는다. 그는 “메타버스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보기엔 어렵다. 페이스북이 ‘메타’로 사명을 바꾸는 등 정부나 기업이 과거와는 달리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투자를 통해 자생적으로 시장을 만들어내면 소비자 트렌드와 상관 없이 시장은 창출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엑스틴은 유년기엔 아날로그 감성, 청소년기엔 싸이월드 등을 경험해 메타버스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세대인 만큼, 이들이 메타버스에 본격 합류하면 메타버스 세상을 더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오죽하면 PDR(Price Dream Ratio)이라는 용어, '주가 대비 꿈 비율'이 등장했겠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힘을 가진 내러티브의 힘이 테슬라에게는 있는 것”이라면서 “더는 예전처럼 회장님 어릴 적 이야기 등의 ‘스토리’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세계관이 있고, 전략이 있는 스토리인 내러티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러티브 자본의 성공 관건은 진정성과 실천행동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김 교수는 “신문 전면 광고에 ‘우리 기업이 이제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해놓고 정작 이사회에 여성이 한 명도 없거나 장애인 고용률을 지키지 않는 등의 사례가 있다”라면서 “진정성 있는 실천이 따라줄 때 사람들이 내러티브를 믿는다. 이것이 기존 CSR과 ESG의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소비자의 존재도 한 몫했다. 적극적인 행동과 말을 하면 사회가 바뀐다는 효능감(특정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 사회 전반에서 높아지면서 내러티브 자본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내러티브 자본은 비즈니스 분야 못지 않게 정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권력 투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자원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완성하는 필수덕목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를 앞둔 올해 국내 정치인들이 구사해야할 내러티브 전략은 어때야 할까. 김 교수는 “기업과 마찬가지로 정치 분야에서도 실천이 중요하다. 말만이 아니라 진정성이 담보된 실천과 행동이 뒷받침돼야 정치인 내러티브가 산다”고 말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가 되든 똑같다’라는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면 투표장을 안 찾게 되는 것 아니겠나”라고 우려하면서 “유권자로서 정치적 효능감이 발휘되기 위해선 결국 선거를 통해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나라가 바뀌려면 필요한 것은 정책이지만 아직은 정책보다 개인적 스캔들이 계속 화두(인 점이 문제)다. 결국 정책 대결을 부각시켜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실행 전략이 뒤따르는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담=이효영 부국장 겸 유통바이오부장 / 정리=김혜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