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텔레토비 동산의 킬 빌

입력 2021-10-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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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푸른 꼬꼬마 동산에 눈부신 아기 태양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민다.

#신나는 전주와 함께 “꼬꼬마 텔레토비 시간이에요. 텔레토비 친구들, 안녕~”이란 내레이션이 흐르면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 등 4명의 텔레토비 친구들이 뛰어나와 동산을 휘젓고 다닌다.

#그런데 그때, 평화롭던 동산에 난데없이 노란 추리닝을 입은 ‘킬 빌’의 주인공 키도가 나타나 무시무시한 일본도를 휘두른다. 순식간에 꼬꼬마 동산은 공포의 도가니가 된다. 꼬꼬마 친구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한때 전 세계 아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꼬꼬마 텔레토비’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무협영화 ‘킬 빌’을 조합한 가상의 시나리오다. 세계를 홀린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내게 이런 느낌이었다. 꼬꼬마 동산의 잔혹 동화.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넷플릭스 플랫폼에서 1위를 휩쓸었고,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울려 퍼진다. 온라인에서는 달고나 키트가 불티나게 팔리고, 드라마 속 출연자들이 입은 초록색 추리닝은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입고 공개 석상에 등장할 정도. 또 ‘오징어 게임(SQUID GAME)’이란 말만 들어가면 어떤 행사든 북새통이다.

이뿐인가. 출연 배우들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됐다. 이정재, 박해수, 정호연, 위하준, 오영수 등 주연 배우들은 연일 국내외 인터뷰로 주목을 받는다. 국내 지자체들은 ‘오징어 게임’ 인기를 활용한 관광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침울했던 한류에 ‘오징어 게임’의 성공은 참 반가운 일이다. 대부분의 넷플릭스 시리즈가 공개한 지 한 달 정도 지나면 인기가 수그러들지만, ‘오징어 게임’은 이례적으로 장수하고 있다. 한류의 국제적 위상에도 크게 기여할 거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열풍의 끝물은 씁쓸하다. 당장, 서구에서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핼러윈데이에 ‘오징어 게임’ 분장 금지령이 떨어졌다. 초록색 추리닝이 불티나게 팔리며 핼러윈데이 최애 분장 아이템으로 부상하자 각국 학교에서는 드라마 속 폭력성까지 모방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한 학교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해 논란이 됐다. 놀이 자체는 해롭지 않지만, 드라마 속 게임에서는 그 행동이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방송 CNN도 전문가들의 입을 빌려 어린 청소년들의 시청을 경계했다.

‘오징어 게임’은 어린이용이 아니다. ‘킬 빌’ 속 무자비한 학살은 ‘복수’라는 명분이라도 깔려 있지만, ‘오징어 게임’은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생존’이 목표다. 거액의 빚을 지고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죽음의 게임에 도전한다는 내용인데, 그 도전 종목이란 게 현재 중년들의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놀이이지만, 실패하면 즉각 ‘제거(죽음)’되는 충격적인 전개다.

시청자들은 원색적인 무대와 기발한 스토리 텔링에만 열광할 뿐, 그 안에 담긴 잔혹성은 외면하고 있다. 게임에 실패하면 바로 총살되고, 사망자들은 스테이플러로 대충 닫힌 관에 실려 소각로로 직행한다. 계속해서 유혈이 낭자하고 등장인물끼리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시청자들은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현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면 말이다.

‘오징어 게임’ 공개 초반, 초록색 추리닝과 달고나 캔디 같은 신드롬에만 주목하던 외신들도 이젠 드라마 속 계급, 탐욕, 야만성에 대해 경고한다. 끊임없는 대학살을 정당화하기엔 그 데스게임의 파급력이 너무 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이 팍팍해도 인간성은 잃지 말자. 영화 ‘킬 빌’은 잊혔어도 노란색 추리닝은 친근하게 남았다.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도 초록색 추리닝은 남을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그걸 볼 때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그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날들을 떠올릴 것이다. 필사적으로 달고나 캔디를 핥다가 반대편에서 비친 실오라기만 한 빛줄기에서 살길을 찾았던 성기훈처럼.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일상의 회복, 위드 코로나 시대가 오고 있다. 고통스러운 시절을 추스르고 평화로운 꼬꼬마 동산으로 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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