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상무부를 통해 일본 기업의 반덤핑 위반 조사를 명했다. 일본 정부가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해 시장을 더럽혔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미국 개별 기업들도 일본 기업들을 제소하며 공세를 퍼부었고, 일본에 돌아온 것은 미일 반도체 협정이었다. 그렇게 일본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줄어 갔고, 아이러니하게 삼성전자가 이후 반도체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다시 한번 상무부를 통해 외국 반도체기업들을 옥죄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건 전 범위에 걸친 기업 내부 자료다.
바이든 행정부의 일방적 요구를 보며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압박을 떠올리는 국내외 시각들은 적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달 말 반도체 공급망을 다루는 기사에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반도체협정을 언급했다.
물론 일본에 죄를 묻던 과거와 기업들의 자발적 동참을 요구하는 현재엔 분명 온도 차가 있다. 당시처럼 반덤핑과 같은 불법 혐의에 연루된 국가는 나오지 않았고, 그렇기에 미국 역시 아직은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안을 놓고 지난번 본지와 대화를 나눈 상무부 부대변인도 한국과 대만 등에 대해 미국의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들의 요구가 자발적이며, 확보한 자료는 규정에 따라 잘 관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배경이나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다. 법을 통한 강제 가능성이 남은 만큼 결말은 같을지 모른다. 이번엔 우리가 일본이 될 수 있다.
도쿄일렉트론 명예회장이자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정권 밑에서 반도체 수석 고문이었던 히가시 데쓰로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쓰라린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명료하다. 반도체 시장에서 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찾기 어렵다는 것. 80년대 미국에 밀린 일본 반도체 업계는 이제 미국을 넘어 한국과 대만에까지 밀리는 실정이다. 히가시는 “컴백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또 없을지도 모른다”며 “수조 엔은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러 이해관계가 엮인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도 어쩌면 1980년대 일본처럼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를 쥐고 있는 건지 모른다. 국내 기업들은 세계 반도체 전쟁 2라운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대응책을 빠르게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