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도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어떨 때는 굳이 보려 하지 않아서 그냥 넘기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아이들에게 물 좀 아껴 쓰라는 잔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몫이다. 하지만 도시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 늘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지고, 쓰고 버린 물은 더 이상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생활만 해온 아이들에게 물 아껴 쓰라는 얘기는 다가오지 않는다. 애써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먹고 씻고 버린 물이 도랑을 흘러 내가 멱감는 개천으로 논물로 가는 걸 보고 자란 이라면 도시 생활의 물도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보지도 배우지도 못한 이들에게 물은 돈으로 치환되는 자원일 뿐이다.
사실 도시화, 산업화의 성장은 우리가 쓰는 자원과 에너지의 흐름을 사회경제 체계라는 어둠상자에 담아 드러내지 않고 관리하며 소비자, 시민들에게는 그들이 매긴 값어치를 지불하는 만큼 공급하는 과정을 복잡화해온 성과이다. 그들 관리자는 자본과 정치·기술 관료이며 신자유주의 공화국의 소비자, 시민은 권한 위임의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어둠상자는 함수이며 사회시스템 이론이다. 금융자본은 어둠상자의 함수를 복잡화해 온갖 파생상품을 만들어 이를 취하고, 정치권력은 취조실과 커넥션의 어둠상자를 독점하며 역시 이를 취하고, 무지개 빛으로 포장된 이들 성장의 어둠상자 속에서 지구 자원은 착취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둠상자가 열리고 있다. 관리능력을 넘어선 착취와 낭비가 성장 어둠상자의 토대인 지구 생태계의 용량과 체계마저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양극화와 지역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사회지속성의 위기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위기관리를 잘해 줄 또 다른 관리자를 찾아 권한을 위임하는 것으로 해결될까? 과연 그런 관리자는 있을까? 이미 우리도 어둠상자 안팎에 붙어 사는 건 아닐까?
기존의 관리자들은 아주 조금씩 기득권을 내놓으며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고 한다. 복잡 다양해진 위기를 관리할 정도를 넘어서니 슬쩍 내미는 손이 거버넌스(협치)이다. 물론 예까지 오는 데 어둠상자를 열어 드러내려는 시민들의 주체적 실천이 있었고, 거버넌스도 성과의 과정이다. 그리고 시민들은 열리고 있는 어둠상자를 제대로 드러내고 관리자들조차 다독이며 가야 한다. 그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지 싶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예까지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을는지요.’ 맹자의 대답은 유명하다. ‘왕께서는 어찌 이(利)를 말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나라도 사회도 무너진다는 일갈.
근래 복잡한 농어촌 문제와 자치분권 흐름에 따라 다양한 민관협치형 농어촌 정책들이 집행되고 있다. 어둠상자를 둘러싼 민관, 위아래 관관, 지역 민민간의 이해관계 긴장이 팽팽하다. 대개는 어둠상자를 여전히 품으려는 관리자들의 행태 때문에 협치가 확산되지 못하고, 그들이 그동안 대상을 관리해온 갈라치기 방식 때문에 민민 갈등도 일어난다. 결탁과 이권의 어둠을 드러내고 위기를 헤쳐가는 일은 결국 살아 숨 쉬는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