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얘, 남 눈치 보지 말고 니들 맘대로 사세요.
배우 윤여정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옷을 사라고. 동시에 윤 씨의 말은 “남의 시선을 상관 말고 살아가라”는 속 시원한 사이다 멘트로도 들린다.
이 영상은 여성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의 광고 캠페인이다. 지그재그는 이용자 취향에 맞춰 4000곳 이상 업체가 보유한 의류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20ㆍ30대 소비자를 타깃으로 한 플랫폼이지만, 광고에는 젊은 모델이나 화려한 패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윤여정 씨가 말을 걸듯 “당신들 마음대로 살라”는 메시지만 전달한다.
4월 공개된 이 광고는 온라인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총 네 편으로 구성된 광고 영상은 합산 조회 수만 해도 770만 회에 달하고, 모델 선정과 광고 문구를 호평하는 댓글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현대차그룹의 광고 계열사 이노션이 제작 전 과정을 맡았다. 이투데이가 지그재그를 비롯해 ‘무신사’, ‘여기어때’ 등 최근 들어 유명 플랫폼 광고를 연이어 제작한 김기영 CR1 센터장(상무)을 3일 서울 강남 이노션 본사에서 만났다.
◇쏟아지는 플랫폼 업계 관심…광고 방영 이후가 더 중요=“지그재그를 운영하는 서정훈 크로키닷컴 대표가 광고 방영 이후에 전화를 500통 가까이 받았다 하더라고요. 다들 광고를 칭찬하길래 이노션이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했대요. 그 뒤로는 저희한테 정말 제작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김기영 센터장은 지그재그 광고가 나간 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숙박ㆍ레저 플랫폼 ‘여기어때’를 비롯해 플랫폼 업계에서 광고 제작 의뢰가 쏟아지고 있어서다. 플랫폼이란 판매자와 소비자가 서로 거래할 환경을 온라인으로 제공해주는 사업자를 뜻한다. 음식 배달부터 쇼핑, 모빌리티, 금융, 교육 등 최근 급성장한 기업 다수가 플랫폼 사업자다. 아직 캠페인이 시작되지 않아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김 센터장은 최근 잘 나가는 여러 플랫폼 광고주와도 계약을 끝냈다.
유독 플랫폼 업계의 관심이 뜨거운 이유는 뭘까? 김 센터장은 아이디어 하나로 시작한 플랫폼 사업자의 성장 배경이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작은 규모로 시작해 성장해온 플랫폼 업계는 광고사를 선택할 때도 회사 규모가 아닌 아이디어를 본다”라며 “다른 사람의 입소문과 평가를 중요시하는 특징이 있다 보니 광고사가 예전에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었는지 찾아보고 선택한다”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광고가 있으면 이를 믿고 제작자를 선택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노션에 제작 의뢰를 하며 김 센터장이 속한 팀을 콕 집어 선택한 광고주들도 있었다.
업계의 관심은 뿌듯한 일이지만, 플랫폼 사업자의 광고 캠페인은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제조업 등 일반적인 기업 광고는 TV에 방영한 내용을 그대로 인쇄물과 옥외에 사용하면 됐다. 하지만, 플랫폼 사업자는 광고 캠페인을 홈페이지와 앱 내부에 연동시켜야 한다.
예컨대 지그재그는 윤여정 씨가 "이 광고 나한테 잘못 들어온 거 아니니?"라고 말하는 예고편이 방영된 뒤 해당 콘셉트를 활용해 앱에서 포인트 적립, 할인 등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했다. 판매 과정에도 광고 콘셉트가 사용되는 만큼, 광고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훨씬 더 중요해진 셈이다.
소비자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성과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광고사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일이다. 김 센터장은 “플랫폼 업계는 하루면 회원 수나 매출로 반응을 측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반응이 좋은 콘텐츠가 확인되면, 이를 활용해 또 다른 후속 콘텐츠를 곧바로 제작해줘야 한다”라며 "기존에는 광고를 제작하기 전까지가 힘들었다면, 플랫폼 광고는 방영 이후가 더 바빠진다"라고 설명했다.
◇브랜드의 지향점과 소비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 만나게 해줘야=“MZ세대는 부모한테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주변에서 ‘옷 좀 그만 사’라는 말을 듣곤 하죠. 그런데 광고에서 마치 멘토 같은 윤여정 배우가 ‘마음대로 살라’고 하니까 여기에 열광한 것 같아요”
김 센터장이 생각하는 지그재그 광고의 매력 포인트다. 그는 브랜드가 말하려는 이야기와 소비층이 듣고 싶어 하는 지점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플랫폼 광고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광고 모델로 윤여정 씨를 선택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김 센터장은 당당함, 자신감이 묻어나는 윤 씨의 평소 어록을 찾아 광고 문구로 준비했다.
관건은 윤 씨의 수락 여부였는데, 다행히도 제안을 받은 윤 씨가 크게 기뻐하며 광고 촬영에 응했다고 한다. 김 센터장은 “윤여정 선생님이 제안을 듣고 ‘젊은 브랜드인데도 나를 캐스팅했냐’며 너무 좋아하셨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당시 뒷이야기를 전했다.
여기어때 광고 캠페인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건네 호응을 얻은 사례다. 이노션은 여기어때 캠페인에서 '도망가자'라는 콘셉트를 사용해 총 7개의 에피소드를 제작했다. 마스크를 낀 채 출근길 지옥철에 시달리는 직장인, 육아에 지친 엄마, 장인어른이 탄 차에 욕설을 뱉은 남성 등 현실감 넘치는 에피소드에 ‘도망’이라는 문구가 더해지며 큰 공감을 불러왔다. 광고 영상의 통합 조회 수가 방영 한 달 만에 1000만 회를 돌파할 정도다.
"‘여행가자’보다 ‘도망가자’라는 말이 더 절실하죠. 주체적으로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욕망이 ‘도망’이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려준 것도 이 광고가 더 설레게 느껴지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신입사원이 낸 ‘여기어때’ 광고 아이디어…‘티키타카’가 중요=김 센터장은 광고 캠페인을 제작할 때 ‘티키타카(Tiki-Taka)’가 돼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축구 전술에서 유래한 티키타카는 대화의 합이 잘 맞아 소통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한다. 광고주와의 소통은 물론이고, 팀 내부에서도 격의 없는 이야기가 오가야 결과물이 좋다는 뜻이다.
김 센터장은 이를 위해 ‘회의시간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어떤 아이디어를 내도 무시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어야 직급과 관계없이 모두가 솔직한 생각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어때 캠페인의 '도망가자'라는 콘셉트는 막내 사원이 낸 아이디어다. 올해 입사한 신입 아트디렉터 이시은 씨는 회의에서 모든 이가 '여행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출 때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가려 여행을 떠났다”라는 경험을 공유하며 '도망'을 아이디어로 냈다. 팀원들 모두가 손뼉 치며 호응했고, 이 씨의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이 씨는 해당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키 플레이어’로 선정됐고, 내부 체계에 따라 적절한 보상까지 받았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을 말할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광고 기획은 끊임없는 고민과 창조가 필요한 작업이다. 영감이 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김 센터장은 '산만함'과 '유연성'이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