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바이든 대통령 당선과 중국의 탄소중립 선언, EU의 공격적인 ESG 입법화를 거치면서 ESG의 재무성과 논의는 그 ‘연관성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 얼마나 영향이 있나’로 바뀌었다. 이익이 늘어나면 배당이 늘고(주주 권익) 이사의 보수와 성과급 또한 함께 증가하기 마련이므로(이사회) 지배구조 면에서 정(+)의 상관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회와 환경 부문도 수출하는 경우 아동 노동, 불평등과 같은 공급망 이슈가 있을 경우 ‘납품이 중단’되고, 기후변화로 ‘탄소국경세를 부과’하는 현실 앞에서 더는 비재무적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재무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비재무적인 ESG를 관리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재무와 비재무의 융합이다. 지속 가능한 상생을 추구하는 21세기형 ‘포용적 자본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지난 300년간 자본주의의 사상적 중추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었다. 인간이 이기심을 추구할 때 사회적 효익도 증가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이기심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인 ‘시장과 가격’에 의해 조절된다. 그런데 정작 그가 의도한 바는 이기심(Selfishness)을 장려한 것이 아니었다. 국부론 원문을 보자. “위대한 국민이 최선을 다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고자 할 때, 또한 ‘자기 이익(Self-Interest)’ 추구를 위해 자신의 자본이나 산업을 사용하고자 할 때 이를 막는 것은 인류의 가장 신성한 권리에 대한 명백한 위반행위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쳐도 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닌. 자기 사랑에 가까운 이익을 말한다. 개인이 돈을 벌고 나와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도 발전한다는 것이다. 회사가 영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재무적 이익 추구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 당연하다. 20세기를 풍미한 주주 자본주의의 사상적 대부 밀턴 프리드만의 그 유명한 문장, “비즈니스의 사회적 책임은 수익을 높이는 것”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이성적인 자기 이익 추구와 더불어 도덕적으로도 ‘공감(Sympathy)’이라는 ‘자기 통제’의 정서를 통해 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추구했다. 그는 “인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서로 도움을 필요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 이익은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고 탐욕으로 치달을 수 있는데,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보이지 않는 손’인 정신적 도덕적 토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서적 사회적 본능으로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다. 공감의 기준은 ‘적정성(Propriety)’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일지라도 적정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경영의 자유가 있더라도 주주나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해치면 안 되고, 비용 효율을 추구하더라도 직원의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되어야 하며, 돈을 벌더라도 과다한 온실가스 배출로 지구를 병들게 할 정도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개인도, 기업도, 사회 전체적으로도 피해가 되어 결국 인간은 천성이자 본능인 자기이익을 추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파멸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여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핵심 사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자본주의 동력을 제시했고, 도덕 감정론을 통해 그 폐해를 막을 방법을 강구했다. 자기 이익(Self-Interest)과 공감(Sympathy)은 현대 자본주의의 두 축이다. ESG 경영을 통한 ‘재무 성과와 사회적 가치의 조화’가 생존 공식이 된 지금, 공감의 경제에 더 주목할 때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