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 실명계좌 발급 미뤄
“불공정·불투명 기준 큰 문제”
일평균 거래액 14조2000억
무더기 폐업 땐 후폭풍 클 듯
◇요건 충족에도… 은행 ‘문전박대’ = 최근 이투데이와 만난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금융당국과 특금법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왔는데 금융당국의 태도 변화가 없어 막막하다고 했다. 은행연합회에서 4월 시중은행에 배포한 ‘가상자산사업자 자금세탁 위험평가 방안’ 가이드라인을 모두 충족했는데도 실명 계좌 발급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이 요구하는 내용을 모두 맞췄는데도 은행이 만나주질 않는다”며 “직접 대면하면 실명 계좌를 안 내줄 이유가 없으니 만남을 피할 수밖에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특금법 요구 조건 중 하나인 ‘ISMS 인증’에는 약 381개의 항목 점검이 요구된다. 외부 솔루션을 구매해 적용하는 경우 5000만 원에서 1억 원 안팎이 소요된다. 인증 이후에도 매년 500만 원가량의 추가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컨설팅, 시스템 구축비, 수수료 등을 포함하면 약 2억 원 안팎이 필요하다. 영세기업에 부담인 ISMS 인증을 취득했는데도 은행이 만나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설명이다.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가이드라인을 충족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ISMS 인증을 취득하고 실명 계좌 발급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업체 관계자는 “최근 4대 거래소가 포함된 국회 비공식 토론회 자리에서 한 거래소 대표님이 어려움을 호소하며 눈물을 보였다”며 “4대 거래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시장에서 배제되고 사업을 접어야 하나”라고 토로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도 “기준이 공정하고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 제일 큰 문제”라며 “4대 거래소에 비해 뒤지는 게 없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가 제시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압박에 은행도 난감 = 거래소를 1~4개 사이로 정리하려는 금융위와 9월 24일 전 실명 계좌를 받으려는 거래소 사이에서 은행도 난감한 기색이다. 시중은행들은 거래소와 실명 계좌를 위한 미팅을 진행하고 있는지, 어느 단계까지 접어들었는지 등을 함구하고 있다. 일부 은행의 실사를 받고 있는 거래소도 확인됐으나, 관련 내용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계약 관련해서 외부에 전달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며 “최근 금융위 분위기가 심상찮아 입을 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가상자산 거래소가 무더기 폐업을 맞을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종사하는 인력들과 투자자들의 투자금 문제가 당장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금융위의 구조조정 구상대로 1~4개의 거래소만 남을 경우 야기될 독과점 문제 또한 우려된다고 입을 모았다.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이 발간한 ‘가상자산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우리나라 가상자산 시장의 시가총액은 42조6000억 원이다. 2021년 1~4월 일평균 거래액은 14조2000억 원, 투자자 수는 약 533만 명으로 추산됐다. 가상자산을 거래하는 154개 거래국가 중 거래수신량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5월 기준 업비트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80.6%다. 업비트를 제외한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사장될 경우 시장의 20%인 약 8조5000억 원이 증발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업비트를 제외한 거래소의 점유율이 낮다지만, 투자자 1인당 평균 1000만 원 정도를 넣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파장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소에 종사하고 있는 인력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한 거래소에 평균 60명 정도의 인력이 있는데, 60~80개의 거래소가 문을 닫는다면 여기 있는 인력들과 투자자들의 피해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금융당국이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